학문이 이념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학문이 이념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디턴 vs 피케티의 대립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박정우 / 사회복지학 석사과정

 

  얼마 전, 앵거스 디턴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개인의 소비패턴과 빈곤 측정을 연관시킨 노력을 높게 칭찬했다고 전했다. 디턴은 수상 소감으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새벽 6시에 스웨덴어 말투를 쓰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분명 여기까지는 한 유능한 학자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받는 아름다운 학문영역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안타까운 모습들이 나타났다. 학계의 경사는 더 이상 학문이 아닌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번져갔다. 언론은 앞 다투어 이를 주도했다.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불평등을 분석한 피케티와 디턴을 연관시키며, 불평등을 중심으로 대척관계를 설정했다. 국내 언론들은 디턴 교수를 반(反)피케티 전선에 세운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진영논리에서 디턴의 학문적 성과는 너무나 단순하게 잘려나갔고, 뛰어난 학문성과는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결국 남은 것은 “디턴은 성장을 옹호하며 불평등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피케티와 대척되는 학자”라는 매우 단순한 결론뿐이었다. 이 사례는 대표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학문이 어떻게 단순화되지를 보여준다.

  아직 미숙한 대학원생이지만, 학문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나는 이 사례를 보고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열심히 피케티와 디턴의 저술들을 읽고 진짜 피케티와 디턴이 대척관계인지 아닌지를 철저히 논박함으로써, “이 싸움을 내가 종결지으리라” 의지를 다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짧은 소견으로는 디턴 그 자체의 공로를 살펴보고 이데올로기가 가린 부분을 사람들에게 되살려주는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더 어울려 보인다. 학문이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고,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재단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아깝고 마음이 아프다.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경계하는 것은, 학문을 쌓는 학술적인 차원과 사회를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적인 차원에서 필요성이 있다. 모든 학문의 결과는 학자의 고뇌가 담겨 있으므로 창의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재단되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연구대상을 왜곡되게 인지할 수 있으며, 선행연구를 읽을 때도 선별적이고 편협하게 읽을 수도 있다. 좁고 편집된 사고방식은 지식의 창의성을 방해하여 학문적 손실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실천적으로 이 폐해는 세상을 이념적 사고에 따라 인식하게 하며, 문제를 가림으로써 비가시적이게 만든다.

  디턴과 피케티의 사례 또는 역사적으로 이념전쟁에 피해를 보았던 많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학문이 이념싸움의 도구로 이용되었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문적 손실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학문은 학문으로서 마땅히 대우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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