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리 /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연구원

[퀴어의 현재]

  이 기획은 현재 한국에서 성소수자 내지 동성애자의 느슨한 대체어로 사용되는 퀴어가 어떻게 인식론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마련되었다. 또한 퀴어가 난해한 학계의 용어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현실개입적 운동과 관계 맺는 정치학임을 주장한다. 특히 ‘앞서가는’ 미국의 연구들을 소개하고 친절하게 주석을 다는 글이 아닌, 현장에서 돌출되는 문제의식들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 중인 석박사, 활동가들의 질문‧주장하는 글을 싣는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바이섹슈얼 인식론과 동성결혼 ②인권거버넌스와 퀴어정치 ③혐오발화세력 정동읽기 ④겁먹은 자들의 커밍아웃

 

 
 

 결혼의 자격: 바이섹슈얼과 결혼

이브리 /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연구원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same-sex marriage)을 합법화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한국의 게이/레즈비언/이반 커뮤니티 일부도 함께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브라질, 우루과이 등에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었을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 반응은 설렘과 기대를 동반하고 있었다. 동성결혼 인정 관련 법정소송 중인 김조광수는 한국이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22번째로 동성혼 합법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발언했다.

한국 성적소수자 커뮤니티와 결혼

  한국 성적소수자 커뮤니티에서 결혼 의제는 이전부터 다른 측면에서 중요한 주제였다. 많은 온라인 레즈비언/여성이반 커뮤니티는 기혼자의 가입이나 이성 간 결혼의 경험을 드러내 놓고 밝히는 행위를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금하고 있다. 커뮤니티의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2014년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인권포럼 바이섹슈얼 관련 토론의 발제자인 오도란은 “레즈비언 당사자로서 가장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제도결혼에 관여하지 않은 상태로서 우선 상상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레즈비언의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삶에서 일단 배제되는 ‘결혼’이 ‘이성 간 혼인’이라는 글쓴이의 부연은 결혼에 대한 평가나 가치판단이 진공의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다시 말해 결혼이라는 제도를 활용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결혼을 평가하는 잣대가 달라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같은 토론 섹션의 발제자 민정의 글 또한 이성 간 결혼을 사회적 압력에 대한 타협 또는 굴복으로 의미화한다.

  한편 동성결혼을 논할 때면 동성결혼 합법화를 추구하는 근거로 세금, 주거, 의료, 보험 등과 관련한 제도적 이득의 필요성이 자주 등장한다. 그럼에도 동성결혼을 ‘제도로의 편입’이나 ‘굴복’이라고 평하는 관점은 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물론 제도에 편입된 이는 법외자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규범에 균열을 내고 저항할 수도 있으며, 그런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은 필요하다. 문제는 경제적‧사회적 곤란을 타파하기 위해 제도를 활용하는 일이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항의 가능성이, 모든 ‘성적소수자’에게 평등하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이섹슈얼을 주제로 한 2013년 LGBT인권포럼 토론에서 이성과의 법적 혼인을 앞둔 한 바이섹슈얼 패널은 자신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결혼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틈새를 파고들며 무언가를 바꿔가고 싶다고 발언했다. 이는 레즈비언의 동성결혼 제도화 논거와 일면 비슷하지만, 많은 레즈비언 참석자가 즉각 분노를 표했고 몇몇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방식으로 무언의 항의를 했다. 분노의 이유는 각기 다르겠으나, 박차고 나가는 반응으로 인해 해당 패널이 주장한 바이섹슈얼 결혼의 필요성이나 저항의 가능성은 부적절한 것이 되었다. 사적 자리에서 더 빈번한 이런 사례는 공적 장에서 또다시 반복된다. 이 사건 이후 다음 해인 2014년 LGBT인권포럼에는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주관으로 바이섹슈얼에 대한 레즈비언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굿바이 바이? 기혼 고 홈?>이라는 제목의 토론방이 열렸다. 그것이 앞서 언급한 오도란이나 민정의 발언이다.

논의의 자격

  이상의 흐름은 한국 성적소수자 커뮤니티가 인정하는 동성결혼 담론의 주인공이 동성애자임을 표명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동성결혼을 통해 결혼제도에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런 편입이 미치는 영향과 득실을 논하고, 결혼 제도를 욕망하고, 결혼을 저항의 다른 방식이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의 도구 등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고, 최종적으로 결혼에 대한 담론을 생성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동성애자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가 아닌 다른 범주를 통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설명하는 사람은 결혼을 둘러싼 욕망이나 담론과 자신의 연관성을 부정해야만, 즉 결혼에 대해 침묵해야만 커뮤니티의 성원권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에서 바이섹슈얼은 결혼, 그러니까 미 연방대법원 판결문이 ‘가장 뜻깊은 관계’라고 적시했고 한국 성적소수자 커뮤니티 일부도 환호했던 그 제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금지된 집단이다. 사정이 이러할 때, 커뮤니티가 결혼 의제와 관련해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배제’한다는 모호한 지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가장 시급한 논의지점은, 결혼을 둘러싼 경험과 욕망을 공유하고 이를 통한 담론을 생성하는 데 있어 정체성이 일종의 자격 요건이 되고, 정체성이라는 분할이 특정 의제에 대한 발언권의 위계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런 정체성의 분할과 위계는 미국의 동성결혼 투쟁 양상과 일정 부분 겹친다. 미국에서 대다수 동성혼 법제화 투쟁은 동성애를 변하지 않는 타고난 본성이라 납득시키고 동성애자 정체성의 불변성과 확고함을 인정받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 상고인, 또는 판결이 영향을 미치는 대상을 동성애자로 호명하는 동성혼 합법화 판결문(한겨레21 제1069호 발췌 번역본 참고)에는 이 점이 잘 드러나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변할 수 없는 본성으로 인해, 동성혼은 이들이 이 중대한 헌신[결혼]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동성결혼을 합법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 동성애자에게 결혼과 관련해서 동성 간 혼인이 아니면 비혼 이외의 다른 선택이 불가능한 까닭에 동성결혼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해당 판결문은 미국 법이 이성애자가 아니면서도 이성 간 결혼이라는 선택이 가능한 존재(예컨대, 바이섹슈얼)를 인지하지 않는다는 선언인 셈이다. 따라서 이른바 LGBT의 역사적 승리로 기념되는 이 판결은 미국 바이섹슈얼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문화적으로 은폐되어있을 뿐 아니라 법적 논의에서도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비시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다. 또한 이성 간 연애, 결혼, 출산 등 전형적인 동성애자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경험을 지닌 미국 동성애자에게는 자기 삶의 서사를 규정하고 해석할 방식을 규율하는 명령이기도 하다.

삶과 이론

  범주에 관한 많은 논쟁은 단지 현학일 뿐, 그 범주에 발 딛고 사는 개인의 실제 삶에는 어떤 영향이나 관련성도 없다는 주장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을 둘러싼 바로 지금의 논의에서 드러나듯, 범주는 개별 삶의 행위와 서사를 생성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통제하기도 하는 해석학적 실천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법과 정치에 매우 강력하게 관여한다. 따라서 현재 통용되는 정체성 범주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절대 현실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범주 자체에 대한 탐구를 기껏해야 ‘재미있는’ 학술적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기각하려는 시도는 고도로 정치적이다. 이런 주장은 주변화되고 은폐된 인식론과 해석이 현 질서에 야기하는 위협을 통제하고, 새로운 정치적 장을 여는 해석 실천을 차단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그리고 만일 한국에서 법제나 그 실행과 같은 소위 현실적 흐름에 이른바 이론적 논의, 다른 종류의 담론이나 인식틀로 개입하려는 시도를 지지하는 장 중 하나가 퀴어라는 이름으로 조직된다면, 퀴어연구나 ‘퀴어’라는 단어에 대한 이런저런 냉소적 반응이야말로 지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가장 현실적인 문제다.

* 글에 좋은 조언을 준 루인과 시우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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