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ㅣ'대학원생'의 이름으로
대학원생의 역사

 

먼지 쌓인 기록들 속, '대학원생'은 누구인가

 

  어느 문화평론가가 말했다(여러분은 그를 11면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기억은 시간적으로 볼 때 과거 시제를 대상으로 하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를 어떻게 불러오는가 하는 호출의 방식이라고. 과거를 향수의 대상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현실적 맥락 속에서 불러오느냐에 따라, 과거는 현재를 잊게 만드는 탈주-추억이 되기도 하고, 미래를 모색하게 하는 복원-기억이 되기도 한다고. 경험의 퇴적물로서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은 ‘홀로’가 아닌 ‘서로’일 때 가능하며, 이렇게 복원된 공통경험은 역사를 만든다고.

  추억이 현재를 잊게 만들고 기억이 미래를 모색하게 한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기억임이 분명하다. 기획을 처음 짤 때만 해도 대학원생의 역사 없음을 문제 삼고, 대학원생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생에게 역사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기억이란 게 존재한 적 있는가? 그래서 이 글은 기억이 아닌 기록에서 시작한다. 대학원생의 역사적 맥락을 짚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나중 과제로 미루고, 먼지 쌓인 기록들을 복원하여 기억되도록 하는 것이 이 글이 하려는 바다. 당대 대학원생들의 목소리와 고민이 담긴, 상대적으로 매끄러운 역사성을 갖는 <대학원신문>이, 대학원생의 기록으로 이 자리에 소환될 것이다.

 

학술운동의 기억을 되살리기

  먼저 이제는 낯선 단어가 된 ‘학술운동’의 복원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학원생의 정체성 확립은 이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그 변화 양상이 오늘의 대학원생을 그리는 지도가 되기 때문이다. 80년대 중반, 군부독재와 민중운동세력 간에 긴장감 넘치는 전선 대치 상황과 열악한 연구 환경에 놓인 대학원생의 물적 조건, 이 두 가지가 대학원 학술운동의 배경이다. 독재와 유신에 맞서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는 변혁주체로 대학원생을 정체화했던 학술운동은, 민주화운동을 위한 전략과 전술을 정립하는 것이 연구자의 역할이라 판단했다. 학술운동은 “‘운동의 과학화’와 ‘학문적 실천’의 통일성 확보라는 현실적 요구에 적극 대응하려는 전문연구자들의 주체적 노력에서 심화되기 시작”했다고, 당시 대학원신문은 말하고 있다.

"3월 대학원싸움"으로 복간된 대학원신문 제15호(1989.4.10.) 그림은 <단결과 전진>(강태웅, 미술학과 석사과정)
"3월 대학원싸움"으로 복간된 대학원신문 제15호(1989.4.10.) 그림은 <단결과 전진>(강태웅, 미술학과 석사과정)

  이와 더불어 학내에서의 학술운동 흐름 또한 중요했다. 중앙대 대학원에서는 88년 하반기에 대학원의 극도로 열악한 연구 환경 개선을 위해 1차 총장실 점거농성 투쟁이 있었고, 이는 89년 2차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학술운동의 주체들은 상보적인 두 가지 시각과 경향성을 지녔는데, 하나는 당시 10대 대학원 총학생회(이하 원총)를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론’이고, 다른 하나는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의 결성으로 이어진 ‘학술운동론’이었다. 당시 원총은 본부에 대한 투쟁을 통해 연구 활동에 필요한 물적 조건을 갖추는 것을, 학술운동론 진영은 진보적인 학술 역량을 재생산하는 것을 각기 목표로 했다. 80년대 말의 투쟁은 중앙대 대학원생들을 ‘학술운동의 기수(旗手)’로 정체화했고, 이는 원총의 위상 강화와 학단협의 건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91년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반적 위기론은 학술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적 지식의 위기와 함께 대학원의 양적 팽창은 학술운동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됐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대학원생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더 이상 진보성이 대학원생의 보편적인 공감대가 될 수 없었고, 대중운동의 기반이 되는 공통의 정체성과 연대 역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학술운동이 이런저런 위기에 봉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90년대 중반까지 학술운동은 자기 모색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99년 5월에 열린 “대학원에서의 학술운동과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학술포럼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학술운동의 흐름이 90년대 말에 더는 자기재생산이 불가능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최소한 대학원의 자치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학술운동은 종료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학술포럼을 취재한 편집위원은 이제 대학원에서 진보적 학문을 추구하는 학술운동은 불가능한 조건에 처했다며, “대학원 공간의 리얼리티가 붕괴되었”다고 진단한다. 이렇게 대학원에서 학술운동의 존립 근거는 ‘개별 연구자의 학술역량 강화’로 변화한다. 이러한 흐름은 대학원생이 개별화된 주체가 되었으며, 그러한 주체들을 결집하는 역량 또한 쇠퇴하였음을 보여준다. 학단위는 진보적 학술활동으로 대학원생들을 묶어내지 못했고, 원총은 점차 학술운동에서 학술사업으로, 이후에는 교육(환경개선)사업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제한했다.

'대학원에서의 학술운동과 지식인의 역할' 학술포럼. 제124호(1999.5.12.)
'대학원에서의 학술운동과 지식인의 역할' 학술포럼. 제124호(1999.5.12.)

 

“죽은 대학원생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학술운동이 쇠퇴하게 된 배경에는, 그 근간을 이루는 대학원생의 정체성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80년대 중반, 아직 중앙대 대학원생 총 정원이 200명이 채 안 되던 그 시기에, 역사는 대학원생에게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자리를 내주었다. 그들은 ‘과학적 정신’이 깃든 비판으로 당대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할 수 있었고, “이 땅의 진정한 자주·민주·통일을 향한 사회 변혁운동에 복무하는 민주세력” 중 한 자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91년이 지나자 이러한 상황은 크게 변화한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로 기존의 진보상이 흐릿해지면서 대학원생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학술운동영역에 암울한 구름”이 드리운 상황에서, 학술 역량 강화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새로운 지식인들의 임무가 된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말까지 대학원생의 위상은 크게 변화했지만, 이들은 오늘과는 이질적인 모습을 공유한다. 대학원생으로서의 자부심 내지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당당하게 자신의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문체로 풀어내는 당대의 대학원생들은, 자신들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대학원신문에서는 대학원생이 교수의 글을 비판하고, 다음 호에는 그 교수가 다시 그 글에 반박하는 경우가 잦았다. 교수 당신의 글은 아주 중요하고 흥미로운 ‘소품’이라는 비꼼이, 당시 대학원생에게는 가능했다.

  오늘날 익숙한 대학원생의 모습은 2000년에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대학원생 K는 그의 애인인 직장인 P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말이 좋아 대학원생이지, 이건. 백수보다 더 악질이야. … 유식한 말들로 남 주눅들게나 하지, 뭐 이 사회에 보탬이 되게 하는 거 있냐.” 안티조선 논쟁으로 지식인의 종말에 대한 논의가 불거지고, 비판적·진보적 지식인의 상이 ‘지식 상인’이라는 자유주의적 주체로 전화됨에 따라 대학원생은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백수’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교육부의 지침과 맞물려 몇 번이고 개정된 학칙에 따라 양적 팽창은 한층 심화하였고, 이는 ‘대학원의 대중교육기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대학원생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은 교수가 아니라 비정규교수, 즉 강사로 재의미화되었으며, “대학원생은 학생인가, 아니면 연구자인가”하는 물음들이 제기되었다. ‘지식인’이라는 기호가 갖는 상징성이 변질되고 ‘연구자’라는 이름의 무게가 더해지는 상황 속에서, 대학원생을 어떤 이름으로도 정체화하기 어려운 오늘날의 현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때 대학원 문틈에 끼었던 K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제149호(2000.12.6.)
"그때 대학원 문틈에 끼었던 K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제149호(2000.12.6.)

  대학원생이 자신을 주체적으로 확립할 만한 공통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은 학생회의 존립 근거를 약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운동의 기반을 가지지 못한 대학원생들은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내면화하게 되었고, 이러한 조건은 공동대응을 더욱 어렵게 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줄서기’와 ‘실적’에만 집중한다든지, 학문을 포기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당연히 이는 대학원생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원신문은 점점 더 침묵하는 대학원생을 답답해하는 방향으로, 그들에게 정치를 독려하고 소통을 구걸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예비’연구자, 학문‘후속’세대 등 유예된 정체성 속에서, 이제 대학원생은 ‘대학원생’이라는 단어 외에는 다른 정체성으로 호명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대학원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한 원우들의 작은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제268호(2010.3.24.)
"대학원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한 원우들의 작은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제268호(2010.3.24.)

전영은 편집위원|na67301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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