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구링 / 불멸의 학문후속세대

특집ㅣ‘대학원생’의 이름으로
대학원생의 오늘

교수님 전상서

쭈구링 / 불멸의 학문후속세대

 

  끝날 줄 모르는 공부의 너머에는 항상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가깝지만 또 아득하게 먼 당신과 나 사이에는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깊은 계곡이 있습니다. “요즘 대학원생은 글빨, 생각빨이 예전보다 떨어진다”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한 것은, 당신이 지적하는 것처럼 ‘얕은 전문지식’과 ‘빈곤한 문제의식’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공부했던 시절, 끝없는 독재와 군사정권을 넘어, 해방광주와 6월 항쟁을 넘어, 민주화를 이끌어내고 시대의 어둠을 넘은 당신에게 어찌 ‘빈곤한 문제의식’을 논하겠습니까. 학자가 되기 위해선 학문과 실천이 함께여야 한다는 당신의 이야기에 어찌 ‘얕은 전문 지식’을 논하겠습니까. 다만, ‘예전보다’라는 비교급에서 21세기 대학원생의 “시대의 어둠”이 얼마만큼 고려되고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소위 연구중심대학이 되고 싶어 하는 중앙대가 대학원을 생각하는 태도를 시작으로, 재학생 1인당 장학금 495만9천 원이라는 허울 좋은 숫자 속 3천만 원 학자금 대출예정자이자, 이를 해결해보고자 신청한 조교업무는 일주일에 절반 이상을 행정직원으로 살게 하고, 이렇게 고생하여 공부한다 한들 국내 학위는 인정해주지 않는 학계 분위기와, 부실한 대학원 교육에 대해서도 그저 당신이 겪은 ‘학문적 괴로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더는 공부할 수 없는 한국의 연구 상황에 좌절하고 해외유학을 고민하는 대학원생들에게 과연 ‘노력낭비’라고 할 수 있으신지요.

당신이 예전에 지나간 대학원생의 길 언저리에 제가 서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당신의 과거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예전에 지나간 대학원생의 길 언저리에 제가 서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당신의 과거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선생님도, 그리고 저도 모두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대학원에 왔습니다. 선생님은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학문하는 이유를 확인하고 성찰하여 연구자의 길을 걸어왔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시대에 가능했던 성공신화를 제게 강요하는 당신은, 현재의 대학원생을 노력하지 않는 연구자로 위치 짓습니다. ‘게으르다’며 나무랄 때는 교수님의 프로젝트나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대학원생들이 ‘학문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당신의 이야기가 선행연구자의 조언이 아닌 교수의 권위의식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교수가 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교수님을 만난 적 있습니다. 죄책감의 이유는 한국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뒤로하고 대학원 진학과 유학 등 학문의 길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죽어가고 괴로워하던 그 시절에 몰래 공부했던 자신에 대한 수치감과 동료들의 눈초리, 교수가 된 자신이 시대적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 빚 때문이라고, 교수님은 말했습니다. 아마 교수님이 아니었어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함께 빚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과연 교수들이 대학원생들에 대해 자신들보다 ‘시대적 의식’이나 ‘문제의식’이 없다는 평가를 쉽게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물음표입니다. 또한 이미 기득권을 쟁취한 교수와 학생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대응할 수 있는 폭은 다릅니다. 이때 교수와 학생은 이 시대를 함께 넘어가야 하는 동지여야 합니다. 험난한 시대가 당신의 탓이 아니었듯, 토건국가와 토건대학으로 진일보 중인, 되살아나는 듯한 “겨울공화국” 또한 젊은이들의 ‘빈곤한 문제의식’ 탓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바뀌어왔던 대학원생이라는 위치, 각자가 느끼는 학문적 깊이와 고민, 그리고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적 상황은 선행연구자와 후속연구자 사이의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간극을 만들어냅니다. 당신이 예전에 지나간 대학원생의 길 언저리에 제가 서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당신의 과거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이 간격을 헤아려주시어 함께 고난을 헤쳐나가는 동지가 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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