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9.4 금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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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내게 농사는그암자 / 사진학도
김재연 편집위원  |  kamja799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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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호]
승인 2015.06.13  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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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농사는

   
▲ 농가가 떠나고 남은 자리

그암자 / 사진학도

  처음 농사를 접한 건 대학 신입생 시절 선배들을 따라 농활을 가면서였다. 농활이 농촌 봉사활동의 준말이 아닌 농민·연대활동이란 얘길 들으며 신선한 충격으로 학교를 떠났다. 여름 농활은 보통 9-10일 정도 기간이었는데 처음엔 정말 시간이 안 갔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을 먹고 일을 돕고 점심을 먹고 또 일을 돕는 하루는 정말 길게 느껴졌다. 농사일도 쉽지 않았다. 뜨거운 땡볕에서 밭을 매고 있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간절해지면서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4-5일쯤 지났을까. 마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덥긴 했지만 흙을 만지고 논을 걷는 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TV, 핸드폰, 인터넷을 떠나 긴 하루 자체를 마냥 보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 좋게 수확하는 밭에서 일하게 되면 마치 일 년 동안 내가 기른 것처럼 뿌듯했다. 농사일은 힘들지만 그만큼 값진 것이구나, 깨달은 시간이었다. 내가 처음 겪은 농사는 그랬다.
  그 당시 제일 친했던 선배 언니는 농활 뒤로 농촌에 푹 빠져있었다. 사진을 찍으며 농촌의 색은 참 예쁘다는 말을 많이 했다. 술에 취하면 농사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도 덧붙였다. 그때는 언니가 농촌의 삶에 왜 이리 열변을 토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저런 것보단 멋진 사진을 찍어야지.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딱 2년 뒤, 우습게도 두물머리 농활 이후 나 또한 그런 선배가 되어있었다.
  두물머리는 4대강 사업으로 지금은 농지가 아닌 공원이 되었지만 우리가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작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4대강 사업을 주제로 촬영하게 되면서 비닐하우스 안 텐트에서 약 2주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농민분들한테 어떻게 다가가야할지도 막막했고 말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의 진심이 통했는지 농민분들도 서서히 마음을 여셨고 그렇게 2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이후 나는 농민분들을 ‘형님’이라 불렀고 사진 작업을 위해 두물머리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당시엔 2주 혹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찾아뵀는데 그러다 보니 농작물이 자라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갈 때마다 “형님 이게 벌써 이렇게 자랐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일도 손에 붙어 순 고르기까진 아니어도 잡초제거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잠깐이지만 도시에서 벗어나 흙을 만지는 게 좋았다. 솔직히 형님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게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철이 없었다. 나는 나중에 귀농이 하고 싶었다. 내가 먹을 음식을 농사지으면 먹고 살진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가끔 가서 보는 형님들의 생활은 꽤 괜찮아 보였다. 출퇴근도 자유롭고 여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소박하게 땅을 가꾸며 사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쩌면 철이 너무 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형님들의 웃음소리보단 한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형님들의 땀이 어쩌면 눈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대강 사업을 겪으며 형님들은 하천 유역의 비옥한 땅에선 더 농사지을 수 없게 되었고 서로 다른 공간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농사는 땅이 참 중요한데 몇 년 동안 일궈놓은 흙을 떠나야만 했다. 그 이후 형님들은 새로운 곳에서 큰 규모로 농사를 시작하셨다. 처음엔 번듯하게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농사로 큰 돈을 벌긴 쉽지 않았고, 농가 부채는 형님들을 소박하게만 살 수는 없게 만들었다. 내게 농사란 그런 것이 되었다. 먹고 살기 힘든 것. 마음이 힘든 것. 이 글을 형님들이 읽으면 속상하시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다.

   
▲ 지금은 볼 수 없는 두물머리 모습

  두물머리에 갔다 오는 길은 술에 취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슬플 때가 많다. 즐거운 얘기를 하고 재밌게 놀다 오는데도 그렇다. 아마도 철이 든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안 다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진으로 작업하는 것밖에 없어 죄송할 때가 많다. 힘이 더 되어 드리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 요즘엔 자주 가지 않는다. 예전 형님들 모습을 더 기억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마 20살의 내가 농활을 가지 않았더라면, 22살의 내가 두물머리 형님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농사나 농촌 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없었을 것이다. 매일 밥을 먹고 생활하면서도 너무 당연하게 잊고 살아갈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일 20살의, 22살의 내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훨씬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겠지. 좋은 학점과 괜찮은 스펙으로 졸업을 하고 적당한 곳에 취직해서 지금보다 잘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때의 경험과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온실 속 화초로만 자라온 내가 조금이나마 온실 밖을 알게 되고 생각을 넓게 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나에게 농사란 그런 것이다. 사진 작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 농촌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된 계기. 나에게 농사는 참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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