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기억해줘, Witness me

 

  거대한 모래폭풍에 휘말린 전투차가 공중에서 폭죽처럼 터진다. 모두에게 수혈 가능한 O형 남자 맥스는 병약한 워보이들의 ‘피주머니’로서 전투차에 장착된다. 사막화된 세계에서 태어난 워보이는 나무를 보고도 그것을 표현할 단어를 몰라 저거, 저거라고만 말한다. 대형 앰프가 설치된 차 위엔 빨간 내복을 입은 사람이 불을 뿜는 일렉기타를 연주하며 전장의 광기를 고조시킨다. 사기꾼 같은 지도자에게 의탁하는 삶, 약탈로 유지되는 삶, 머리 두 개 달린 도마뱀을 씹으며 삶의 목적은 오직 살아남는 것이라 되뇌는 삶. 핵전쟁 이후 물과 기름이 고갈되고 인간의 수명이 반토막난 22세기. 영화 <매드맥스>(2015)가 보여주는 망한 세상의 풍경이다.

  노후화된 원자력발전소 몇 군데가 터지고 피폭된 인류가 장원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매드맥스>의 미래는 위화감이 없다. 이 미래는 또한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도 보인다. 워보이들은 창을 던져 노예를 포획한다. 그들이 타는 전투차량은 배기구로 숨을 뿜으며 육중한 짐승처럼 헐떡인다. 근미래가 과거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어쩌면 시간 자체의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이 시계와 같지 않다면, 시간은 초침이 흐르듯 뜨고 지는 태양의 움직임과도 같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인과관계이다. 그것은 인간 외부에 있는 객관적 법칙이 아니라 경험의 전제조건이다. 노력하는데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시간은 거의 멈춰있다. 너무 많은 책을 읽어버린 사람은 천 년의 시간을 통과했다. 세월호 유가족‧피해자들이 상실한 대상을 놓아주지 못하는 우울증자,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면 이는 그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은 느리거나 빠를 뿐만 아니라 순환하고 반복되는 것으로 경험된다. 남대문 경찰서는 서울시청 광장 사용승인이 난 제16회 퀴어문화축제의 평화적 집회를 보장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남대문 경찰서는 퀴어퍼레이드가 예정된 ‘6월 28일’ 집회신고에 대해서 선착순 접수를 고지했다. 집회신고는 관할 경찰서에 집회 개최 30일 전부터 접수 가능하며, 동일한 장소에 여러 건의 집회신고가 접수될 경우 선착순으로 집회신고 우선권을 주고 있다. 국내 10대 대기업이 경찰에 낸 집회신고의 99%는 자사를 비판하는 집회를 막기 위한 ‘유령집회’였던 만큼, 이러한 방식은 집회의 자유를 원천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해왔다. 고지를 받은 축제 관계자들은 집회신고 당일인 5월 29일까지 8일간, 밤낮 줄을 섰다. 그러나 이미 첫 번째 대기자는 반대세력이었고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퀴어퍼레이드의 ‘거리행진’을 금지한다는 ‘옥외집회금지통고서’를 받은 상태다. 언젠가 학습지노동자들이, 대량해고 됐었던 마트노동자들이, 집회신고를 위해 매일 새벽 사용자 측 용역노동자와 선착순 달리기를 하던 모습이 겹쳐졌다. 사태를 파생시키는 구조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일은 반복된다. 변수들이 그물망처럼 교차하면서 반복은 다른 양태로 나타난다. 매순간 달라지는 경험 때문에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듯하다가, 우연한 순간 과거를 현상한다. 세월호 1주기 집회에 앉아, 구할 수 있었는데도 구하지 않았던 이해 불가한 죽음들을 상기했다. 수십 년 전 광주, 그보다 더 오래 전 남쪽의 섬에서, 빨갱이로 몰려 죽어나간 사람들과 그 소식을 뒤늦게 들었던 당대 사람들의 감정을 상상했다. 이 감정이 그 감정과 똑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완전히 다른 사건들이 회귀하는 비극으로서 등가적인 사건들로 느껴졌다. 나는 발전론적 서사가 가지는 문제점을 안다. 선형적인 시간관이 파생시키는 한계와 폭력들을 안다. 그런데 정확히 그 서사를 체현하며 살고 있었다. 발전론적 시간이라는 상상적 차원이 금이 가서 슬펐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몰랐다.

  <매드맥스>에서 워보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때 “Witness me”를 외친다. 왜 이것은 “나를 기억해줘”로 번역되었을까. 기억해 달라는 것은 나를 때때로 상기해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Witness me, 증인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이는 나를 과거에 박제하지 말고 지금 증명해 달라는 어떤 주체의 요청이며 기억하는 사람을 목격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명령이다. 반복의 모래폭풍을 뚫고, 그린란드가 아니라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회귀하는 비극을 비틀어낼 유일한 길이다.

 

홍보람 편집위원 | silbaram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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