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 /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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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 전 편집장

  나는 지난 학기까지 대학원신문에서 일을 했다. 무기력한 시절이었다. 학내 이슈를 다뤘던 기사들은 항상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끝났다. “학내 구성원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길 바란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이번 학기 신문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느꼈던 무기력함을 현 편집위원들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바로 그 점이 흥미로웠다. 남들이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그걸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318호 <논평> ‘인문학, 문사철도 자기경영학도 아닌’에 보면 “‘대학은 평등한 구성원들 간의 학문공동체’라는 바로 그 문장에 책임을 지라고, 교수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강제해야 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편집장 역시 매호 사설에서 남이 대신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뭔가 대단히 많은 것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당신에게 남은 것”이 정치라는 사실만 잊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핵심은 자기 자신을 좀 괴롭히라는 얘기였다. 검열 탓으로 <무구유언> 코너에 원고가 실리지 못했을 때, 편집위원이 해당 원우에게 직접 사과문을 작성해 지면을 채운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분량의 한계로 늘 겉핥기 기사밖에 작성하지 못했던 1면을 2면의 <더 보기>에서 보강한 것도 훌륭한 결정이었다. 내가 편집위원이었을 때 가장 작성하기 쉬웠던 코너는 <학술취재>였다. 교내 특강을 듣고 녹취만 풀면 됐다. 원고매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이게 꽤 길어져서 거의 기획기사 수준이었다.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싶었다. <원우논문>의 경우 논문을 쓴 저자가 직접 본인의 추후과제를 고찰하는 코너를 추가한 것이 현명한 선택으로 보였다.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 고민을 읽으니까 힘이 났다.

  <글로 배우는 농사> 코너에서도 농부님들의 무력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코너를 기획한 김재연 씨는 자기가 비겁하다고 생각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 어느 기사를 쓰든 부끄럽다는 말만 계속한다. 무력감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고, 고작 반성밖에 할 줄 모르는 자기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지고, 다시 무력감을 느끼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너무 슬프다. 그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긴 있으니까 안심해야 할까? 이렇게 발버둥을 쳐도 바뀌는 것이 없으니까 괴로워해야 할까?

  대학원신문은 발버둥을 친다. 뭐라도 더 해보려고 매 학기 디테일을 보강한다. 이런 칭찬은 해봐야 도움이 안 된다. 더 많은 전공의 원우들의 다양한 글을 실어야 한다는 충고는 매호 신문평가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주지 않을 거라면 그런 충고도 솔직히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아, 그런데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생겼다. 학생들 좀 괴롭히면 안 되나? 한 줄씩이라도 좋으니까 교내 이슈 들여다보고,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면 좋겠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다들 웃으면 좋겠다. 아 너네도 다 엄청 괴로워하는구나. 선진화고 뭐고 나한테는 별로 혜택도 없구나. 내가 졸업하면 그걸로 학교 올 일도 별로 없구나. 그걸 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한 줄씩>이라는 지면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원고도 문자로 받으면 될 것 같다. 확인할 때가 된 것 같다. 확인시킬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들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부끄러운가?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뭐가 제일 중요했어야만 했는지 잊지 않는 사람들이다. 애도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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