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연 / 사회학과 석사과정

 다채로운 사랑의 색(色)을 위하여

백조연 / 사회학과 석사과정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아델은 우연히 마주친 엠마를 보고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을 느낀다. 아델은 가슴 한구석에 뻥 뚫린 그 자리를 엠마를 통해 채워간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로부터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되고 사랑은 끝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랑, 이별은 흔한 연애 과정이다. 그런데 이 흔한 연애 주체에 섹슈얼리티를 대입했을 때 흔한 연애가 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또는 이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축복(또는 위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의 사랑은 축복이나 위로를 받기 전에 그 사랑을 드러낼지 고민해야 한다. 게다가 벽장 밖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간에 이들의 사랑은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인지 아델은 여자인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눈물을 흘린다. 그리곤 “자신이 이상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을 알았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는 이성애자는 없다. 그러나 동성애자는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설렘보다 두려움을 느낀다.

  “이성애/동성애,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논쟁과 실천”을 다루겠다고 했지만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논쟁’만이 남아버린 수업이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의 목격담, 종교적 신념 등을 언급하며 나름대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짝사랑하는 동성을 향한 어떤 이의 호의가 “소름 돋아, 노렸네요, 노렸어”라며 호들갑 떠는 아이의 말을 통해 역겨운 것으로 해석되었을 때에는 화가 났고, 누군가가 “동성애자 친구 커플을 보니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더라”며 동성애를 보편적인 사랑으로 대변하려 했을 때도 달갑지 않았다. 나에게는 열띠게 오고 가는 말과 말들이 차갑고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 자리에는 동성애자가 (있었지만) 없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는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에 의해 목격된 사람으로, 또는 누군가를 “노렸던 사람”으로 부유했을 뿐, 실재하지 않았다. 동성애에 대해 말하는 우리는 (당연히) 이성애자였고,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동성애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자리에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역겹다거나 다르지 않다는 말이 쉽게 내뱉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차가웠던 공기를 나는 지금도, 자주 경험한다. 아무도 이성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동성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만약 그 수업의 논쟁 주제가 ‘이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성애자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식의 질문이었다면 그때의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아마도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며 ‘왜 이런 얘기를 해야 하지?’라는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황당한 웃음을 덧붙이면서.

  그래도 나는 묻고 싶다. 이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성애(동성애)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떠한가. 자신이 누구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그리고 그 사랑들은 모두에게 축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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