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방 사람들, 안녕! 

 

  무엇이, 한 사람을 자신이 속했던 공간에서 뜯어내어 국경을 넘도록 만드는 것일까? 어떤 기대. 미래에 대한 기대. 지난 시간의 결핍을 다가올 시간의 충만과 대비시키는 발전론적인 시간관은 불확정성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하나의 표면장력처럼 작용한다. “애증을 품게 만드는 한국사회”는 “서유럽 대학에 대한 호기심”과 결합하여 선형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유학은 성차별‧학벌차별‧대학문화의 비민주성으로부터의 탈출이고, 수입되는 번역서들의 원저자인 ‘대가들’을 만날 기회이며, 비싼 대학원등록금으로부터 해방되어 ‘펀딩’을 통해 좀 더 안정적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이고, 앞으로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희미한 보증이다. 한국대학은 곧 이 모든 것의 결핍상태다. ‘어쩔 수 없잖아, 다 사실인데’라고 체념하기보다, 늘 일종의 타협물인 경험이 어떤 사회적 의미체계 속에서 응고되며, 이 응고물의 효과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학문과 언어의 글로벌 권력관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학생이 좌절, 타협, 혼란, 성취감 등 복잡한 감정 속에서 영미권, 특히 미국대학‧미국학문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일상적으로 체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여기서 상상적으로 구축되는 것은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스처럼 시간성이 배제된 채 성립하는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간극이다. 인종과 국적은 출생과 함께 부여받은 정태적 정체성이 아니라 늘 현재의 지정학적‧정치경제적 조건들 속에서 자신의 내용을 유동적으로 채우는 인식범주다. 단순히 ‘약자’로서의 유학생을 배려하는 휴머니즘적 태도와 유학생이 타국 대학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실용주의적 접근은 역사의 특정한 국면에서 형성되는 짜임관계로서의 권력구조를 묵인하며 이루어지는 최소한의 응급조치이다. 따라서 인종이나 국적을 주요한 변별적 차이로 이해하기보다 무수한 차이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동시에, 현재 인종과 국적이라는 범주가 왜 결정적 차이처럼 나타나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이들을 물화시키지 않기 위해, 다양한 서사들이 많이 발화되었으면 좋겠다. 주변부에 구체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정당성을 획득하며 작동하는 지배헤게모니에 저항하기란 늘 요원해 보이지만, 지배헤게모니를 지탱하는 내 안의 상상적 서사를 의심하고 혼란을 겪는 과정은 저항의 단초일 것이다. 그동안의 원고들에서 한국은 명료한 지리적 공간 또는 정체성의 준거로는 파악될 수 없는 ‘모호한 중력’이거나, 때때로 특정 국적의 사람들에게 폭력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집단, 어른의 옷을 입고 있는 불쌍한 소년이었다. 문지방 사람들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을 이어받아 더 많은 물음이 쏟아져야 한다. 중국학생들이 과연 한국학생들과 유사한 발전론적 시간관을 갖고 유학을 오는가? 미국 중심 학문헤게모니의 유비로서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문제적으로 보인다. 문지방 사람들 원고에서 ‘한국’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고, 이들 ‘유학생’들은 누구이며, 인종이라는 범주는 언제 국적‧젠더‧계급과 접합하며 돌출하는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위한 우선적 조건은 후루하시 아야 씨가 지적하는 대로, ‘동지애’ 같은 것이리라 생각한다. 들어주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트램펄린으로 존재하는 공간.

  어쨌거나 우리가 여기, 대학원에 머무르며 공부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홍보람 편집위원 | silbaram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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