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재 / 대구가톨릭대 노어노문학과


상반기 인문과학 기획면에서는 인지과학과 인문학의 접점과 새로운 시도를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본 호에서는 인문학, 더 나아가 텍스트 비평에서 인지과학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발제주의 내지는 구성주의 등으로 번역되어온 enactivism의 경우 배문정(2014)의 지적처럼 그 전복성에 비해 번역어에 따른 혼란이 있습니다. 이에 원어 그대로 활용하고자 하는 필자의 의도를 반영해 편집자의 번역 없이 그대로 싣고자 합니다.

 

 
 

 인문학 열풍이 불기나 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인문과학이 언제 인문학으로 둔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더군다나 모를 일은 인문고전을 읽으면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좋아진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인지과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착각이라는 본성이 그런 잘못된 믿음을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인문학의 연구대상인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 인문학은 인간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간다. 롤랑 바르트 식으로 말하면 자연화 현상이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그저 인간이거나 인간 일반이고 추상화된 인간일 뿐이다. 사회과학으로 넘어 가면 이러한 사태는 더욱 심해진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로서 기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이 동물인지 기계인지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과 신체, 감정, 경험 등으로 구성된 복합체로서의 인간을 전제하지 않으며 추상적인 인간 일반을 부당전제한 후에 인문학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사고를 전개한다는 말이다.
 물론 문학에서 인간의 자아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정신 일변도의 문학 접근법이 지배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장정일이 <시사In> 제400호에 쓴 글에서 “한국은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문학은 정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문학에서 신체라는 문제설정을 아예 배제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인지과학적으로 말하면 신체화된 정서(embodied emotion), 신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의 차원에서 문학텍스트에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지과학에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라는 용어가 있다. 인지과학은 인지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여기서 인지를 폭넓게 정의하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인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창조, 변화시켜 나가는가를 가리킨다. 이렇게 정의할 때도 문제는 그 ‘인간’이다. 인간이 대상을 인지하면서 무엇을 인지하고 그 인지에 대한 느낌은 무엇이고 어떤 경험을 통해 그러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인지 등에 대해 인지과학은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학문들은 인간을 그저 인간 일반으로만 언급하고 인간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인문학과 인지과학은 어디에서 만날까

 인지음악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크리스토퍼 롱게 히긴스가 1973년에 처음 사용한 인지과학은 정보과학, 심리학, 신경생리학, 철학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와 같이 생각한 계산주의, 두뇌에서 유추하여 심리과정의 모델을 만들려고 한 연결주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인지과학은 흔히 마음의 철학으로도 불리는데 이것만으로는 인지과학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인지과학은 인공지능, 인지언어학, 뇌 과학,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이론, 창발성, enactivism, 오토포이에시스이론 등을 모두 포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지 또한 상상, 지각, 시공간적인 능력, 마음과 신체, 정서와 느낌 등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지과학의 역사에서 신체 혹은 신체적인 것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신경과학과 신경 모델링 분야에서 대혁명이 시작된 1980년대부터다. 이 시기를 인지과학에서는 제2세대 인지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제1세대 인지과학은 철학과 별반 차이가 없다. <프레임 전쟁> 등의 저자로서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인지과학자이자 스페인의 사회당 정책이론가인 조지 레이코프는 “철학이 몸의 가치를 과소평가했다. 마음의 체화가 완전히 이해되면 더욱 인본주의적인 세상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우리는 뇌의 신경계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 2500년 전에 선험철학에서 나온 비체화 이성 개념은 앞으로 30년 안에 학문세계에서 사라질 것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비단 문학텍스트만이 아니더라도 기존에 몸에 대한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경과학, 뇌 과학의 관점에서 몸에 대한 비평을 한 경우는 없다. 푸코를 보더라도 그렇다. 푸코의 신체-정치학은 인지과학적인 관점에서 신체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
 인문학이 인지과학과 만나는 접점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일본에서 인지문학론은 1980년대부터 일찍 시작했지만 텍스트를 굳이 문학텍스트에 한정시키지 않더라도 인간을 주제로 하는 인문학은 인간을 복합체로 파악하는 인지과학과 만날 수밖에 없다. 인지과학은 신경과학 같은 자연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인지과학은 그 범위가 자연과학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문예술, 사회과학 등 전반에 걸쳐 있는 것이다. 인지음악학, 신경미학, 신경윤리학, 인지법학, 인지신학, 인지철학, 인지경제학, 인지문화론, 인지영화학 등 인지과학은 그 자체가 말 그대로 통섭학문이다. 그러므로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는 피드백 관계가 성립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자연과학(원인)이 인문학(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그 결과가 원인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인문학의 지위를 올리거나 내리는 환류관계 말이다. 인문학은 지금 거대한 환류 속에서 인지과학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인지적 리얼리즘과 쟁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지과학은 텍스트비평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인지과학에서는 시각, 지각의 문제가 상당히 중요하다. 트로시안코가 <카프카의 인지적 리얼리즘>에서 말했듯이 “카프카에 대한 환상적일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비평작업들이 있었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보고(see) 독자들이 이러한 지각행위들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와 연관하여 특정하게 시지각에 대해 집중했던 비평가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문학사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pictorialism(60년대 인지혁명 시기 논쟁에서 심적 이미지)과 enactivism을 구별하는 가운데 전자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리얼리즘 문학과 후자에 바탕을 둔 인지적 리얼리즘을 구별하고 폰타네, 디킨스, 발자크 등을 전자에 포함시키고 카프카를 인지적 리얼리즘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인지적 리얼리즘에서 경험은 재현이 아니라 행위(act)로 파악되고 이것과 연관하여 정서(e-motion 행위, 움직임)가 비평대상이 된다. 작가는 그림(picture)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 행위를 보여준다.
 Enactivism이란 말은 좀 생소하기 때문에 설명하자면 인간의 뇌가 눈으로 지각정보를 받아들일 때 반드시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 이미 1초 전에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은 후에 손가락이 움직인다고 주장한 리벳의 실험처럼 인간은 대상이나 세계를 수동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나 환경과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각 이전에 이미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각에 대한 감각운동적인 모델로 알려진 enactivism은 1990년대 인지과학의 역사에서, 신체화된 정서 등의 개념 이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인지적 리얼리즘에서는 과거의 미메시스론, 반영론, 거울의 은유 등은 폐기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데카르트의 극장’ 같은 사고실험도 재현주의(representationalism)로서 인지과학자인 다니얼 데넷에 의해 폐기된다. 시각이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온 ‘변화맹시’ 현상이 보여주듯이 세계는 내적으로 자세하게 재-현되지(re-presented) 않는다. 외부세계에 대한 내적인 그림(picture) 없이 지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문제는 물리적 현상과 의식의 경험 사이에 심연이 있다는 ‘의식의 난제’(인지과학자 찰머스의 개념)로서 인지과학의 쟁점으로 남아 있다.
 주변에 뇌와 마음에 관한 책은 널려 있고 인지과학과 연관된 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지과학 연구와 거기에 바탕을 둔 새로운 학문적 담론의 생성 문제는 거의 제시되지 않고 있다. 회자되고 있는 통섭의 현장은 인지과학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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