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글을 교정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글은 뒤엉킨 사고의 덩어리를 분절하는 일련의 단어들의 조합이다. 글이라는 형태로 사고가 물질화되면 비로소 사고의 비어있는 부분이 보인다. 비어있는 부분을 메우고, 엉켜있는 부분을 풀거나 새로이 엮는, 쓴 것을 다시 쓰는 그 반복의 과정이 글쓴이의 사고와 감각을 재구성한다. 타인에게 닿기 위해 쓰는 글은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글을 바라보는 실천을 요구한다. 글은 나를 드러내고, 나를 재구성하며, 이 재구성의 과정에서 나를 ‘나’로부터 분리시켜 타인이 되어 볼 것을 강제한다. 그러니까 글을 다 쓴 후 내가 더는 이전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나의 숙고에서 연유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내가 잠시 당신이 되어보았기 때문이다.

  즉, 글은 고치면 고칠수록 나아진다는 공리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셈이다. 결과물이 나아진다. 그리고 문장을 다듬는 내가 나아진다. 대학원신문 편집위원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결과물인 청탁 원고가 가장 잘 전달되도록, 글쓴이의 의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마감 직전까지 문장을 다듬고 단어를 바꾸어본다. 자연스럽게 수행되던 이 작업은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원우들의 원고를 받고 잠시 중단되었다. <문지방 사람들>에서만큼은 교정 작업을 지양하고 유학생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우리는 어쩌면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전달하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일종의 법으로 작동한다.

  미국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게 된 데리다의 푸념을 들어보는 것은 이 ‘법으로서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그는 말한다. “영어로 나 자신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는 하나의 의무다.” 영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 이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종의 상징적인 힘이나 법이 나에게 강제됨을 의미한다. 다수가 이방인을 환대하고 그에게 말할 자격을 부여했을 경우에는 더욱더 다수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의범절이나 공손함인지 아니면 강자의 법이나 민주주의의 공평한 법인지 선뜻 말하기 어려운 법에 준거하고 있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어쨌거나 영어로 말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또한 자신이 속한 상황으로부터 언어 자체에 대한 통찰을 끌어내는 문장들이기도 하다.

  유학생의 원고에서 한국어는 부분부분 굴절되어 있었다. 몇몇 조사들이 생략되면서 독특한 리듬감이 나타났다. 문법―자명한 논리의 전개방식에 거리를 둠으로써 우리가 잠겨 있는 언어체계를 낯설게 만드는 사람들이 시인이라면, 유학생이 쓴 글은 한국어 체계에 온전히 섞이지 못한 그/녀의 필연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시적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녀의 평소 음성 자체이기도 했다. 이것을 교정보는 일은 어쩌면 ‘우리와 똑같이 말하라’는 요구였다. 이것이 존중인지, 공평함인지, 강자의 법인지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왜 한국인의 원고는 교정하면서 유학생의 원고는 교정을 최소화하는가, 유학생의 말하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겠다는 의도가 유학생을 대상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내부적 비판이 제기되었다.

  결국, 명백한 맞춤법 오류만 최소한으로 고치고 의미전달이 잘 안 되는 부분을 필자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잘 안 들린다, 다시 말하라, 정확하게 말하라, 라고 하는 것은 이미 너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녀가 던진 말이 내게 도달할 때까지. 거기엔 유학생/너의 노력뿐만 아니라 내국인/나의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학문체계, 지식체계 속에서 이방인이며, 말을 더듬는다.

 

홍보람 편집위원 | silbaram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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