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 미 동부 주립대 박사과정

 경계 속에 살다

 

남의 나라 겨울은 춥다
남의 나라 겨울은 춥다

고난 / 미 동부 주립대 박사과정

  백인학생의 비율이 70%에 가깝고, ‘표준’ 영어를 쓰는 미국 동부의 학교에서 영어를 잘 못하는 아시아 여성 대학원생의 삶은 외줄타기 하는 것과 같은 긴장과 균형을 요구한다. 일상에서든 학교에서든, 늘 나에 대한 경계들을 생각하고 그것들을 협상해야하기 때문이다. 미국인 혹은 영어를 잘하는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영어를 못하는 나를 배려하면서 천천히 말하거나, 교수들이 조교로서의 일이 힘들지 않냐고 거듭 물어볼 때 혹은 아예 조교로서의 일을 맡기지 않을 때, 고마우면서도 그들이 인종적, 언어적 타자로서의 선을 그어버린 후 나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꺼림칙했다. 하지만 동시에 친구들이 영어를 너무 빨리 말해 말을 못 알아듣고 나서, 여러 번 뜻을 물어보거나 (결국 못 알아듣고) 내 쪽에서든 혹은 친구 쪽에서든 대화를 포기해버릴 때, 조교 일이 많아 내 수업준비와 병행하기 힘들 때는, 외국인 학생에 대한 배려를 은근히 바라기도 했다.

  이것은 어쩌면 경계에 선 사람들이 겪는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백인/미국인의 인종적 타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도, 그들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묵인하면서 나의 타자성을 인지하지 못할 때 불편함을 느끼는 것. 하지만 타자성에 대한 자기 인지와 타자로만 위치 지어지는 것에 대한 불편함 간의 모순은 쉽게 해결될 수 없기에, 나는 그 모순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협상해야 한다. 물론 그 모순을 당장 회피 혹은 (표면적으로) 극복할 수도 있다. 엄청난 개인의 노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미국인 학생들만큼 혹은 그들보다 탁월한 학술적인 성과를 이룩하는 것, 또는 내 부족함과 그들과 똑같이 될 수 없음을 수긍하고, 그냥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갈 외부인으로 스스로를 위치 짓는 것. 그 엄청난 능력도 없고, 그것을 메우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고(이것은 문제다!), 열등생으로서 스스로를 인정하는 용기와 한국으로 돌아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미래에 대한 확신도 계획도 없는 나로서는 그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 추진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그 모순의 경계선들을 변화시키는 직접적인 개입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선택은 문제적이다.

  물론 처음에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나는 때때로 미국 친구들도 다 못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텍스트들을 내가 다 읽어갈 수 있는가, 혹은 미국 애들은 못하지만 나는 해내야지 라는 생각의 양 편향을 오고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굉장히 이상하고 좌절스러운 경험을 했다. 영어에 대한 능력과 학술적인 능력을 등치시키면서(물론 미국 유학생활에서 전자가 후자의 필요조건이긴 하다) 텍스트의 줄거리와 핵심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내 사고로 연결시켜 발전시키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무신경했다는 점이다. 아마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 학생으로 인지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가, 공부 자체에 대한 부담과 결합해서, 영어 책 내용 파악을 잘 하는 것이 그 타자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 착각했기 때문이리라. 아직 이 모순 속에서 어떻게 협상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경계 속에서 사는 경험들을 내 학문적 연구와 연결시키고 설명하려는 노력, 말하자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서 다른 사회적 관계들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위의 고민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것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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