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 /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이슬람 여성‘들’

 

<사르코지 복귀할 것인가> "들어가!" "말아!" "들어가!" "말아!" 사르코지와 함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 카를라 브루니. 복귀를 놓고 우유부단한 사르코지를 비꼬았다.
<사르코지 복귀할 것인가> "들어가!" "말아!" "들어가!" "말아!" 사르코지와 함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 카를라 브루니. 복귀를 놓고 우유부단한 사르코지를 비꼬았다.

조선정 /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무슬림을 모욕한 만평을 실었다는 이유로 테러를 당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둘러싼 오해는 이 주간지가 반 이슬람의 선봉에 섰다는 것이다. 이 오해를 교정하자면,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혐오를 표방한 우파의 정서를 지향하는 언론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권력을 조롱하는 불경스러움으로 살해협박과 소송에 자주 시달리면서 대중의 무관심을 견뎌온 비주류 소수 좌파에 가깝다. 또한, 테러범들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국제적 범죄 집단이기 이전에 불과 50여 년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의 이주민 2세대로서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으되 차별과 억압에 익숙한 프랑스 내부의 하위계층(subaltern)이다.

  이렇게 테러 사건의 속살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서구 대 이슬람’이라는 도식적이고 이분법적인 인식틀로는 복잡하게 진화하는 이슬람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애도와 연대의 함성에 자족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전쟁이나 문명충돌의 틀을 넘어서, 자본과 노동력의 국제적 이주와 만성화된 차별구조 그리고 부패한 정치세력과 세습종교권력의 야합 등이 얽혀서 빚어내는 복합적인 국제정치의 모순이 이슬람 문제의 기저에 깔려있다. 말하자면, 테러는 단순히 이슬람 세력이 서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세계사적 국면에서 구체적인 정치경제의 역학관계가 폭력적으로 발현되는 야만의 상태를 지배 권력의 관점에서 서사화하는 것이다. 이 야만을 지배 권력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보편주의와 세속주의의 환상 속에서 여성화되는 이슬람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긴 여정에 작은 걸음을 보태는 취지에서, 이슬람 여성으로 주제를 잠시 좁혀보자. 우리가 보통 무슬림 여성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계기는 복장이다. 무슬림 여성이 착용하는 스카프, 얼굴가리개, 드레스 등의 복장은 이슬람 문명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이슬람을 말하면서 이슬람 여성을 말하는 것, 이슬람을 이슬람 여성으로 치환하는 이런 전략은 얼핏 보면 여성에 대한 집착 같기도 한데, 크게 보면 서구 문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여성화’로 볼 수 있다(이를테면 우리가 소비를 여성적 활동으로 정의하는 것도 여성화의 사례이다). 여성화되는 순간 그것은 열등한 타자로 전락하기 쉽다. 이슬람은 여성이라는 젠더를 입고 여성으로 호명된다.

  이슬람 여성은 서구 제국주의 상상력 속에서 구원과 계몽의 대상으로 재현된다. 2001년 9?1 테러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내세웠던 명분 중 하나가 이슬람 여성을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이슬람 문화의 일부다처제와 같은 가부장제 전통을 여성억압의 악습으로 규정하고 그런 이유로 이슬람 문화의 소멸을 주창한 것은 열띤 토론을 유발하면서 페미니즘과 제국주의의 공모에 대한 자기반성을 끌어내기도 했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무엇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슬람 여성이라는 범주는 유럽이 아프리카, 터키, 중동, 동유럽에서 이주한 무슬림 인구의 동화정책을 펼 때에도 적극 전유된다. 무슬림 여성의 복장은 서구문명에 동화되었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지표이다. 프랑스의 동화정책이 더 억압적으로 보인 것은 특유의 공화주의 이념 탓이다. 공화주의를 떠받치는 ‘세속주의’ 전통은 종교(사적 영역)와 정치(공적 영역)의 분리를 엄격하게 명문화하고, 종교는 개인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해결될 사안이며 공적인 영역에서 드러낼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세웠다. 이 관점에서 보면, 무슬림 여성의 복장은 세속주의 전통을 두드러지게 위반한 행위이다. 집에서는 허용되지만 학교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또는 학교 복도에서는 허용되지만 교실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여성의 복장을 두고 벌어진 논쟁은 예컨대 다른 직업은 몰라도 공립학교 교사는 될 수 없다든가 복장을 포기하지 않으면 여권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연장되었다.

  이슬람은 세속화하기를, 현대화하기를, 서구화하기를 일방적으로 요구받은 것이다. 애초에 평등하게 싸울 수도, 이길 수도 없는 싸움이다. 결국 프랑스는 2010년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가리는 복장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함으로써 이를 위반한 여성에게는 벌금이 부과되고 아내와 딸에게 복장을 강요하는 남편에게는 징역형이 가능하도록 했다. 수십 년 동안 사회적 논쟁의 비용을 치루면서도, 동화정책은 진정한 공존의 윤리가 되지 못하고 차이와 갈등의 요소만 부각시키고 말았다. 동화는 차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차이에 위계를 새겨 넣으면서, 그 위계를 지배 권력의 논리에 맞춰 영속화하는 통치의 기제이다.

지금 한국에서 이슬람에 관해 말한다는 것

  최근 우리사회가 경험하는 극심한 지역갈등, 세대갈등, 젠더갈등과 거기에서 배태된 도를 넘은 혐오발언을 지켜보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특이한 복장이나 고유한 문화적 양태가 공적 영역에 출현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함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분위기가 없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든다. 프랑스 공화주의 이념이 그런 것처럼, 우리사회 역시 공적 영역을 지나치게 보편화하고 신비화한다면, 예컨대 외국인이나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는 개인적으로는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만 공적 영역에 나올 때는 정상성의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고 자의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그럴 때 자행될 무슬림 여성에 대한 억압은 우리 안의 제국주의의 추악한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슬람 여성에 대해 말하는 이 글은 궁극적으로 이슬람 여성이라는 범주의 해체를 요청한다. 이슬람 문화와 무슬림의 삶 자체도 일상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거니와, 이슬람 여성을 고정된 본질이나 순수한 실체로 이상화하지 않으면서 역사적 맥락과 권력관계에 따라 재구성되는 복합적인 수행성의 다채로운 모습에 주목하는 것이 이슬람 여성을 이해하는 첫 걸음일 것이다. 이슬람 여성이라는 집단적 정체성 대신에 이슬람 여성‘들’을 만날 때다. 그들의 목소리들이 들리고, 욕망들이 읽히고, 몸들이 보여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슬람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결코 다 알거나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점성가 우엘벡의 예언> "2015년에 이가 빠지고(상태가 안 좋아지고)…" 2022년에는 라마단에 들어가!" 이슬람포비아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 '복종'의 저자 우엘벡을 그렸다.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뿐 아니라 이슬람포비아 또한 풍자했음을 알려주는 만평이다.
<점성가 우엘벡의 예언> "2015년에 이가 빠지고(상태가 안 좋아지고)…" 2022년에는 라마단에 들어가!" 이슬람포비아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 '복종'의 저자 우엘벡을 그렸다.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뿐 아니라 이슬람포비아 또한 풍자했음을 알려주는 만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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