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세속주의를 말하기 전에

 

<내가 다 용서했다> 사건 후 1월 14일에 발행된 샤를리 에브도의 표지. 마호메트가 '나는 샤를리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내가 다 용서했다> 사건 후 1월 14일에 발행된 샤를리 에브도의 표지. 마호메트가 '나는 샤를리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두고 ‘표현의 자유 대 테러’라는 이분법이 구성되면서, ‘세속주의’라는 개념이 함께 화제가 되었다. 세속화(secularization)는 사회가 종교 또는 전통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뜻한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종교는 더 이상 공적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사적인 영역으로 퇴각했으며, 그리하여 공적 영역에서 종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근대화 기획의 실패, 현대의 승리에 역행하는 전통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세속화 논지이다. 이 입장에 기반한 이들은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이슬람이 아직 충분히 세속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해석한다. ‘이슬람은 세속화되어야 한다!’ ‘종교는 이미 사적인 믿음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특정 잡지사의 표현의 자유를 관용하지 못하고 의견의 교류가 오가는 공적 영역으로서의 사회에 돌출하여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극단적 폭력의 방식으로 고수했다!’

  이슬람의 폭력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이슬람을 전근대적 시간대에 머무르는 덜 문명화된 종교로 규정하는 효과를 파생하면서, 이슬람의 여성 억압적 상징물로 흔히 표상되는 ‘베일’을 이 규정의 물증으로 제시한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한국에서의 논의가 프랑스의 베일 논쟁으로 회귀한 것은 이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이고 탈종교적인 개인을 상정하는 세속주의와, 무슬림 여성들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다문화주의 담론 그 사이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보편주의는 유사 제국주의처럼, 다문화주의는 실제적 폭력들을 묵과한 채 차이를 위계화 하면서도 이를 관용과 인정의 정치로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와의 물리적‧문화적 거리 때문에 이러한 논쟁을 풀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서구 페미니즘 시각과 이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탈식민주의 시각을 옮겨 다니며 분열증적으로 동일시한다. 이슬람 여성‘들’과 프랑스에서의 베일 논쟁은 조선정 교수의 글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고, 세속주의 자체를 먼저 되물어 보자.

  세 가지 명제를 꼽아볼 수 있다. 첫째, 세속주의는 보편적 현상이 아니다. 종교의 퇴각이 19세기 이래로 쉽게 이뤄졌다는 것은 확정적이지 않다. 교회 공동체 소속이나 의례 참여 등 제도적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세속화의 경향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지만 의식이나 정서 등 비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세속화가 아닌 종교적 삶의 경향이 지속된다. 또한 나라마다 세속주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세속주의는 보편적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 프랑스에서 세속적인 국가와 세속적인 사회를 볼 수 있다면 영국에는 국교적인 종교와 세속적인 사회가 있다. 미국은 종교적인 사회와 세속적인 국가로 볼 수 있다. 세 개의 근대 국가와 사회에도 다양한 세속주의가 존재하며, 세속적 원리를 거스르는 것에 대해 다른 종류의 반작용이 나타난다. 예컨대 국가와 종교의 분리에 대한 명백한 규칙을 가진 미국도 정치와 현 정권에 비세속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부시 정부의 중심은 기독교 우익 세력이었고 이라크 전쟁이라는 ‘세속적인’ 전쟁은 ‘종교적인’ 이유로 그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둘째, 세속주의 논리는 그 자체가 국가‧정치와 종교 사이의 분리 불가능한 상태를 지시한다. 정치적 교의로서의 세속주의는 종교적 지형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 맺는데 본연의 종교가 무엇이며 그 적절한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를 규정하는 주체는 종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가정되는 세속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종교의 수용 가능한 공적인 면을 규정하는 기능을 가지며 이것은 국가 및 현대의 정치학에 종교가 배태되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함의한다.

  셋째, 세속주의는 단지 정치와 종교 사이의 분리 불가능함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통치 기제로 작동한다. 세속주의를 보편주의적 가치로 수용하는 대신 왜 세속주의가 특정한 문화를 사사화(privatization)하고 자신의 원칙을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문화적 제국주의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문화에 지배받지 않으면서 모든 문화와 종교에 안착할 수 있는 정치적 원리로서의 세속주의라는 자기 재현은 스스로에게 문화들 위에서 문화를 관용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한다. 관용되는 타자들을 통해 세속주의 정치는 관용하는 주체, 보편적 정치의 영역이라는 환상을 소급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슬람의 세속화를 섣불리 이야기하기 전에 선행해야 할 작업은 무수히 많다. 프랑스의 세속주의, 즉 라이시테가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짚어봐야 하며, 그것이 무슬림이나 이주민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왔는지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슬람의 역사와 오늘날의 이슬람에 대해, 그리고 이슬람을 둘러싼 정치적 지형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또한, 세속주의 비판을 넘어 세속주의를 재전유하는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논의들도 참고해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어떻게 논의되고 있으며 그 논의들이 우리들의 어떤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인지, 우리들의 좌표에 대한 점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샤를리 에브도를 말할 때 우리는 테러의 희생자에게도, 테러 이후 파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에게도, 그리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20만명의 무슬림에게도 가닿지 못할 것이다.

 

홍보람 편집위원 | silbaram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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