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취재: 제175회 중앙 게르마니아 금요 콜로키엄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ZeDES)와 독어독문학과에서 주최하는 중앙 게르마니아는, 근대서양 사유의 원천을 짚는 금요 콜로키엄이다. 작년에는 ‘세계를 뒤흔든 10권의 책’이란 주제로 칸트, 다윈, 마르크스, 베버 등의 고전을 살펴보았고, 올해에는 ‘오늘의 세계를 보는 10개의 시선’을 주제로 미래에 고전이 될 가치가 충분한 젊은 고전을 통해 유럽적 가치의 실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타진할 예정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의 얼어붙은 내면을 깨부수는 한 자루 도끼와 같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직접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날카롭게 해줄 현재 진행형의 고전들과 만나보면 어떨까. 이번 학술취재에서는 사회학과 백승욱 교수의 강의로 진행된 올해 첫 중앙 게르마니아,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소개한다.

  150년의 마르크스 연구사중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뛰어난 저술로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꼽을 수 있다. 알튀세르는 이 저작을 통해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고, 마르크스에게 미완성인 부분을 보완하고자 했다. 알튀세르가 어떻게 이 목적을 달성했는지 마르크스의 ‘인식론적 단절’, 모순의 과잉결정, 이데올로기론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이해해보자.

 

1. 마르크스의 ‘인식론적 단절’
: 포이어바흐적 소외론에서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으로

  마르크스의 인식론적 단절은, 무엇보다도 포이어바흐적 소외론과의 단절이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본질>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종교란 인간의 본질이 외부로 투사된 것이며, 결국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청년 헤겔학파는 포이어바흐를 받아들여 인간의 본질이 실현되는 장소인 시민사회가 억압되고 소외된 형태로 국가를 만들어내고, 그 국가에 의해 다시 지배를 받는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적 소외론은 역사, 과정, 변증법이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즉 인간을 추상물로 파악함으로써 구체적인 분석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비판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봄으로써 현실의 운동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포이어바흐주의자였던 청년 마르크스는 1844년에 프랑스에 가서 노동자들의 시위를 보고, 코뮤니스트와 만나면서 현실에서의 운동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이제 현실의 문제를 파악하는 방법은 ‘비판’이 아니라 ‘운동’이 된다. 이 1843년에서 1844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는데, 알튀세르는 이를 정치적 입장이 먼저 바뀌고 아직 이론은 정치적 입장을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본다. 즉 정치적으로는 코뮤니스트이지만,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포이어바흐주의자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1844년 분석의 핵심이 ‘노동의 소외’라는 초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적 본질은 노동이며, 노동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고, 그로 인해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되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적소유의 철폐이며, 운동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에서도 역사, 과정, 변증법이라는 문제의식이 없으며, 여전히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적 비판에 머무를 뿐, 구체적인 분석으로 나아갈 실마리가 없다.

  이 지점에서 1845년의 저술인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가 중요해진다. 1번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이 관조적이고 직관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사물들의 연관관계를 사유하지도, 개념적 사유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기계적 유물론, 경험주의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이다. 어떤 세계도 직관적으로 이해될 순 없다. 손에 잡히지 않는 ‘자본주의’라는 것을 탐구하는 과정은 생산관계, 잉여가치, 가변자본, 불변자본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개념들을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헤겔이 말했듯 “학문이 엄존할 수 있는 토대는 개념의 자기 운동에 있다.” 즉, 하나하나의 비연관적 이름/명사들의 합계가 이론이 될 수 없으며, 연관성들을 파악하는 ‘개념’만이 비판적 사유의 시작으로서 학문이 될 수 있다. 테제 6번에서는 포이어바흐가 인간의 본질을 추상물로 파악함을 비판하면서, 만약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이는 추상적 인간 본질이란 없으며,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때 관계‘들’은 생산관계라는 유일한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가 있음을, ‘앙상블’은 그 관계들이 조합되는 독특한 방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사회적 관계들을 연구해야 하고, 그보다 중요하게 그 관계들이 ‘특정한 시기’에 어떤 앙상블을 구성하는지 분석해야 한다. 이로써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게 없는 ‘역사’를 되찾는다.

2. 모순의 과잉결정

  먼저 overdetermination이 ‘중층결정’이 아니라 ‘과잉결정’임을 강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심급들의 중층성으로 이해하여 중층결정이라 번역하지만, 이 용어를 사용하면 여러 개의 모순들이 층으로 쌓여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해석은, 각각의 모순들이 순수하게 따로따로 존재하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이 장의 제목이 overdetermination of contradiction임을 고려할 때, 하나의 모순이 과잉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따온 것으로, 프로이트는 꿈의 다중인과성을 지적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즉, 꿈은 하나의 의미적 맥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꿈 작업을 만들어 내는 요소는 여러 경로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에서의 모순이 역사적 모순이라는 것과, 순수한 대립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모순의 존재조건들의 모순 내 반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모순의 존재조건이 모순 외부가 아닌 모순 내부에 들어가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자본가와 노동자는 단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추상적’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노동자는 ‘국민’인 동시에 ‘인종’이고, ‘성별’과 ‘연령’을 지니는 등 특정한 방식으로, 늘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자본가도 마찬가지로 구체적 자본가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순수하게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나타나지 않으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모순이 만날 때 그 모순은 이미 다른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과잉결정은 일상적 조건이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과잉결정인지, 지금 어떤 쟁점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부각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3. 이데올로기

  앞의 두 주제가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에게 미완인 부분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적 틀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에게 모든 사고는 올바른 의식과 그릇된 의식으로 나뉜다. 알튀세르는 라캉을 매개로 프로이트를 간접적으로 수용하면서, ‘무의식’이란 개념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허구가 아니며, 실재적 존재조건에 대한 실재적 관계와 상상적 관계의 과잉결정된 통일체”다. 이데올로기는 허구가 아니라는 알튀세르의 말은,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라는 일반적 해석과는 달리 이데올로기가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라캉에게 상징계 없이 주체가 구성되지 않듯이,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 없이 주체는 구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징계와 상상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결여 때문에 그 주체의 구성은 늘 불완전하다. 알튀세르에게 호명은 형식적 틀을 의미하고, 그 형식적 틀에서 ‘나’라는 주체 각각은 서로 다른 자리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특유한(singular) 주체로 만들어낸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개인은 유일무이한 단일한 주체가 되지만 이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통일체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이후의 저술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일반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별한다. 이데올로기에 호명된다는 것과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종속된다는 것은 다르다. 이데올로기 일반은 늘 우리를 호명하며,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이 필요하다. 이데올로기 일반은 사람들을 묶어내지만, 각각의 개인은 각각의 해석을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분리하는 힘과 묶어내는 힘을 동시에 가지기에, 알튀세르는 운동이 성공하려면 이데올로기 속에서의 싸움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영은 편집위원 | na67301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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