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계간 <문화/과학> 북클럽

제11회 계간 <문화/과학> 북클럽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지난 달 24일(화),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와 공공운수노조연맹 세종문화회관지부의 공동주최로 “제 11회 계간 <문화/과학> 북클럽”이 열렸다. 이번 북클럽의 주제는 중앙대 영문학과 강내희 교수의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였다. 한림대 연구교수 조형근의 사회와 계원예대 서동진 교수의 토론으로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연구의 방법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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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강내희 교수의 핵심 논지를 살펴보자.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는 크게 두 가지의 축을 관통하며 전개된다. 제목에서도 예상해볼 수 있듯이, 그 축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축적전략으로서 금융화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정치경제’라는 문제설정이다. 이날 논의 또한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문화정치경제’의 문제설정
  문화정치경제는 문화, 정치, 경제를 각각 자율성을 지닌 사회적 실천의 층위로 인정하되, 그것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주목하여 사회 또는 사회적인 것을 복잡한 전체로서 이해하기 위한 문제설정이다.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비판적인 인문사회과학 연구에서 대표적인 세 가지 경로다. 즉, 정치경제학 비판은 문화를, 비판적 문화연구는 경제를, 문화경제학 비판은 정치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거나 분석에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문화, 정치, 경제를 분리해서, 혹은 정치경제와 문화정치와 문화경제를 분리해서 다룬다. 저자의 문제설정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학문적 관행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이 책은 그동안 자본주의 비판에서 문화정치에 주목함으로써 정치경제의 중요성과 토대로서의 경제적 실천의 역할을 무시해 왔다는 비판적 문화연구 전반과 저자 자신에 대한 성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화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자본주의가 채택하고 있는 기본적 축적체제라면, 금융화는 이 체제를 작동시키는 주요 전략이다. 신자유주의를 축적체제(regime)라고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축적체계(system) 중 특정 국면으로, 혹은 단계로 보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축적체계의 상승 국면과 하강 국면, 즉 산업적 팽창 단계와 금융적 팽창 단계 중 후자에 위치된다. 그러나 단지 신자유주의가 금융적 팽창 단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금융화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금융화 외에도 노동유연화, 민영화, 시장화, 자유화/개방화, 구조조정, 세계화, 탈규제, 복지 해체 등의 전략으로 특징지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금융화를 특히 핵심적인 축적전략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전략들이 금융화를 촉진함과 동시에 금융화에 의해서 강화되기 때문이다.

금융파생상품과 기획금융
  신자유주의가 오늘날의 지배적인 축적체제이고, 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전략이 금융화라면, 금융화를 추동하는 기제는 금융공학 또는 금융상품의 전면적 적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선택한 주요 분석 대상은 금융파생상품과 기획금융이다. 금융파생상품은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가치 통약’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는 신자유주의적 금융화가 작동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기획금융은 오늘날 시공간을 재구성하는 대규모 건설사업의 자원을 조달하는 데 활용되는 핵심적인 금융기법이다. 따라서 금융파생상품과 기획금융을 관통하는 핵심은 시간경험, 공간경험, 주체형성이라는 세 가지 고리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진행되면서 중요한 금융공학으로 떠오른 파생상품과 기획금융은, 우리의 시공간 경험 방식과 주체형성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시간의 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미래할인 관행’이다. 현재는 과거를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시간, 나아가 미래의 가치를 할인하여 미래를 말소시키는 시간으로 작용한다. 공간 또한 투자의 대상으로 변화하였다. 집은 부동산이 되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투자자‧채무자 주체로 변모했다. 이렇게 재편된 시공간 경험 방식과 주체형성 방식은 새로운 문화정치경제 구축의 조건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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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토론자였던 서동진 교수는 강내희 교수의 저서를, 문화정치에 주목하여 경제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던 지금까지의 문화연구를 비판하고 문화연구에서 경제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질문하는 중요한 지적 기획이라고 평했다. 그가 제시한 토론거리의 핵심을 요약해보자면, 하나는 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문화정치경제라는 문제설정은 불충분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의 문제와 연결되어 강내희 교수가 다시 문화정치의 문제설정으로 복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문화연구와 경제
  존 스토리는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두 개의 경제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는 금융 경제(financial economy)라고 불리는 돈과 관련된 경제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와 쾌락을 다루는 경제이다. 이중 문화연구의 대상은 주로 후자이며 의미와 실천, 정체성, 하위문화, 팬덤 등에 주목해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문화정치, 즉 경제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문화정치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문화정치라는 문제설정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문화분석에 대한 염증과 반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 경제가 문화를 결정한다는 식의 기계적 인과성의 폐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연구가 경제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세계에서, 경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인정한다면, 문화연구에서 경제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가?
  저자의 답변은 ‘경제와 문화, 정치의 세 영역은 따로 볼 수 없으며, 경제가 문화를 결정한다는 식의 기계적 인과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러니 문화정치경제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이를 관계성의 체계로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경제이고, 경제는 문화다”라는 식의 답변은 주류경제학 내에서도 상징경제, 체험경제, 미적경제 등의 담론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때 문화 자체는 경제학이 다뤄주길 원하는 경제의 플러스 알파와 오메가 이상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문화정치경제의 문제설정이 문화, 정치, 경제라고 불리는 세 가지 심급이 존재한다는 틀 자체를 유지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볼 경우 경제, 문화, 정치라고 불리는 독립된 영역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그대로 가져가는 셈이다. 오히려 이 영역들은 주어진 사회의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둘러싼 환상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하는 그 부제가 암시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의 핵심은 왜 경제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에서 착취적인 사회관계는 하필이면 가치, 상품, 화폐 등이라 불리는 필연적 가상을 빌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문화라는 범주와 그 범주로 포괄되는 지각, 체험, 제도 등의 모든 것이 문제 삼아야 할 대상으로서, 하나의 가상으로서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연구는 곧 문화라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짐멜의 덫
  두 번째 논점은 “왜 하필이면 파생상품과 기획금융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파생상품은 그 작동원리가 너무나 화려하고 현란하다. 거래되는 파생상품의 어마어마한 화폐가치는 비현실성 그 자체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험과 지각의 직접성을 상실하도록 한다. 즉 우리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파생상품의 미망(illusion)을 확인하고 그것에 몰두하게 되었을 때, 체험의 진정성을 되살려야 된다고 주장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비평으로 복귀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화폐, 금융과 문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들은 지상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지하에서는 짐멜주의자라고 평한다.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 <돈의 철학> 등에서 화폐화, 합리화, 지상화라고 불리는 것과 문화적 체험의 소외, 직접성의 상실, 진정성의 붕괴라고 하는 생철학적인 테마를 연결시킨다. 이는 곧 자본주의적 소외 비판이다. 파생상품 또한 마찬가지다. 파생상품에 우리가 유혹당하는 이유는 파생상품이 이러한 직접성의 상실을 극단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결국은 벤야민도 빠져들고 말았고, 결국은 아도르노도 빠져들고 말았던, 특히 루카치로 대표되는 짐멜의 덫. 그러나 이 덫에 걸려서 자본주의적 소외 비판으로 빠지고 마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귀결이라는 측면도 있다. 왜냐하면 금융화를 문화분석과 연결시킬 때 진정성의 상실을 빼놓고, 즉 자본주의적 소외 비판을 빼놓고 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금융화의 환상을 비판하는 것이 의미 없는 작업도 아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지배적인 유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이러한 방식의 비판이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본 글은 강내희 교수의 저서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와 당일 강내희 교수의 발표, 서동진 교수의 토론 녹취록을 바탕으로 편집위원이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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