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영 / 영화학 박사,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학술-더 보기]


<두 개의 문>, 포렌직 느와르로서의 정치적 다큐멘터리

조혜영 / 영화학 박사,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2012년 개봉해 독립 다큐멘터리로서는 이례적으로 관객 수 5만을 넘으며 돌풍을 일으켰던 <두 개의 문>은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 정치적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9년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농성을 벌이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경찰의 무리한 진압과정에서 화재로 사망한 사건을 다룬 <두 개의 문>은 미학적 스타일과 사안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어 기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와는 상이한 방식을 채택했다.

  이 영화는 현장에 있던 경찰, 인터넷 방송 비디오 저널리스트(VJ), CCTV 등에 의해 촬영된 실시간 파운드 푸티지를 사용해 망루가 세워지던 낮부터 화재가 일어난 새벽까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여기에 변호사, 활동가, 인터넷 방송 VJ 등과 같은 전문가들의 인터뷰 논평 및 화재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재판에서 제시된 여러 증거와 증언이 교차편집 되었다.

  <두 개의 문>에서 사용된 실시간 촬영 파운드 푸티지는 상당하다. 당시 현장 채증만을 위해 투입된 수십 명의 경찰들과 진보 성향의 실시간 인터넷 방송 VJ들의 카메라 그리고 거리 전체를 조망하며 하이 앵글의 롱 쇼트로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던 CCTV까지, 이들은 사전에 협의한 적도 없고 서로의 아젠다나 정치적 관점도 다르지만 거의 사각지대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사건 현장을 실시간으로 촬영했다. 이들은 마치 동일한 소프트웨어와 플랫폼을 제공받은 비디오 게임의 협력 플레이어처럼 활동했다. 이들은 일반 장편 다큐멘터리들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의 고화질과 다양한 사이즈와 각도로 촬영된 안정된 영상을 제공했다. <두 개의 문>은 이런 면에서 주제와 목적, 형식적 스타일에 대한 기본적 합의를 근거로 하는 집단(collective) 제작 방식의 영화는 다른 일종의 협력(co-operation) 영화였다고 할 수 있다. 협력 영화는 협의나 합의는 없지만 유사한 질을 보장해주는 소프트웨어와 카메라의 공유, 상당한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공유한다.

  이러한 구성은 관객들에게 두 가지 효과를 발생시킨다. 우선 <두 개의 문>은 몰입과 체험을 통한 사건의 경험을 제공한다. 실시간 영상의 사건 재구성은 관객들이 당시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체험은 이중적으로 이뤄진다. 관객들은 실시간으로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감각을 제공받을 뿐만 아니라 마치 변호사, 검사, 형사, 혹은 포렌직 느와르의 수사관들처럼 재판의 증거를 위해 사건 현장을 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피해자의 주관적 관점이나 인터뷰를 배제한 이유 중 하나다. 관객들은 처음부터 이미 결론이 내려진 피해자의 관점을 제공받기 보다는 전문가의 관점에서 스스로 자신의 인지능력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취합하고, 비교하고, 검토하고, 판단하기를 원한다. 더 나아가 실시간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파운드 푸티지들은 그 자체로 재판에 제출된 가장 중요한 증거였다(경찰의 촬영 목적은 처음부터 법적 증거 채집이었다). 정보화 시대에는 영화가 세계의 증거가 되는 것을 넘어서, 증거가 영화가 된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세계로서의 영화는 프로그램 된 세계가 된다. 이때 영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증거를 위한 데이터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관람 행위는 곧 증거를 찾기 위한 데이터 탐색, 축적, 비교, 검토가 된다. 이런 행위는 또한 편집을 위해 파운드 푸티지를 비교, 검색하는 영화감독의 행위와도 유사하다. 여기서 투쟁 현장은 사건 현장 혹은 범죄 현장이 되기도 하고, 영화 현장 혹은 노동 현장이 되기도 하며 여러 현장의 레이어를 가상적으로 동시에 품게 된다.

  사실 <두 개의 문>은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CSI>와 유사한 전략과 장르적 약호를 갖는다. <두 개의 문> 역시 <CSI>처럼 관객의 인지적 참여를 유도하고, 죽음과 데이터를 볼거리로 전환하며, 포렌직 느와르의 장르적 약호와 정보미학을 차용하기 때문이다. 통제 사회의 포렌직 느와르는 2차 대전 후 유행했던 고전 느와르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포렌직 느와르의 주요 캐릭터가 법체계 내에서 규칙을 지키는 여러 팀원과 함께 협력하는 범죄과학 수사관이라면, 심리적 고전 느와르는 법 바깥의 고독한 아웃사이더 혹은 사설탐정 일인이 주인공이 된다. 포렌직 느와르가 투명하고 밝고 ‘쿨(cool)’한 것을 추구한다면, 그림자를 선호하는 고전 느와르는 모호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두 작품 모두 포렌직 느와르의 장르적 약호를 활용하면서 관객들이 인지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느낌을 제공한다. 그러나 <CSI>가 결국 참여의 환영과 데이터와 시체에 대한 물신적 매혹에서 그친다면, <두 개의 문>은 그와 같은 이미지들이 제공되는 생산양식과 안전과 통제의 체제를 여러 가상적 레이어를 통해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는 데서 차이점을 갖는다.

  그리고 이것은 <두 개의 문>의 두 번째 관객 효과와 연결된다. <두 개의 문>은 죽음과 정보가 안전 통치 속에서 스펙터클이 되는 과정을 노출시키며 관객의 정치적 역량을 일깨운다. 거의 사각지대 없이 촬영된 영상들(심지어 경찰과 경찰, VJ와 경찰들은 채증을 하거나 방송용 촬영을 하고 있는 서로를 촬영한다)은 우리가 감시자마저 가시화되는 열린 판옵티콘 사회에 살고 있음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러한 과잉된 이미지와 정보의 노출을 통해 <두 개의 문>은 법 그 자체를 반대하기 보다는 포렌직 느와르처럼 경찰이 법과 규칙을 제대로 지켰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한다. 실시간적 사건의 재구성은 경찰의 투입시기와 작전 전개와 변경을 치밀하게 포함시킨다. 관객들은 디지털 네트워크를 흐르는 정보 이미지이자 법적 증거가 될 데이터들을 관람하는 행위를 통해 시민의 안전과 통제를 방패막이로 삼은 경찰이 스스로는 법과 규칙을 어떻게 지키지 않았는지, 또 다른 시민인 철거민과 말단 경찰들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구성된 여러 레이어의 가상공간은 그 자체로 투쟁 현장이자 영화 현장이며 범죄 현장이 된다. 그 곳은 한국의 전통적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들이 중요하게 여겨왔던 물리적 현장은 아니지만 그 모든 현장들이 가상적으로 충돌하고 겹쳐지는, 그리고 관객들이 그 결을 체험하고 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상적인 정치적 현장(virtual public sphere)이 된다.

  <두 개의 문>은 마지막 장면에서 불타는 망루를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며 멈춰 있는 카메라를 통해 결코 접근하지 못할 공간을 보여준다. 망루는 재판의 핵심이 되었던 공간이자 죽음을 스펙터클화한 이미지였지만, 그 죽음의 순간 사각지대 없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거칠 것 없이 유동적으로 이동하던 디지털 카메라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중지된다. 모두가 망루에 진실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빈 중심, 빈 진실일 수도 있다. 칼라TV VJ의 인터뷰처럼 경찰이 시민의 안전을 이유로 시민을 적으로 취급했다는 진실은 이미 여기에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