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만 / 사회학과 석사 수료

[복지의 가면: ④ 복지국가와 금융세계화: 국민연금]

국민연기금, 한국 자본시장 개방의 지렛대

김승만 / 사회학과 석사 수료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논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연금이다. 2013년부터 최근까지, 기초노령연금, 국민연금에 대한 국가 지급보장 명문화, 국민연기금의 자산운용전략과 의결권 행사, 사적 연기금 활성화 대책, 공무원연금 개혁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월 연금과 관련된 사회적 쟁점이 등장해 한국사회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산불평등이 점점 심화되고 실질임금 상승률이 0%에 이르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노후생활 보장 자산으로 기대받고 있는 연금의 정책 변화는 국민 전체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 정부의 복지지출에서 연금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점차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연금제도의 변화를 사회정책에 국한시켜 사고하거나, 특정 정부의 정치적 이념이나 정책적 선택의 결과물로 이해하는 것이 최근에 일어난 변화의 원인과 효과를 추적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는 연금제도가 사회정책을 초과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연금제도는 소득 재분배와 사회적 연대라는 규범적 원리에 따라 독립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연기금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항상 이미 정부의 재정·통화정책의 일부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분적립방식으로 운영되는 한국 연금제도의 특성상 매년 막대한 적립금을 축적하는 연기금은 화폐의 시간가치를 계속 가늠해 자산을 운용해야 하는 기관투자가라는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즉, 연기금은 국가의 거시경제관리 메커니즘과 지구적 자본시장의 금융적 질서가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따라 사회적 위험을 보호하는 ‘사회화된 자본’으로서 기능할 수도 있지만, 미래의 기대수익과 리스크의 상관관계에 따라 최적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보유자산의 현재가치를 최대로 유지해야 하는 ‘금융적 축적 수단’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물론 현재 한국에서의 연금제도와 관련된 변화는 바로 연기금이 후자로서 작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채와 금융위기라는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에서 운영되는 연기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국민연기금이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발표한 최근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민연기금은 매입가 기준으로 511조 원을 조성하고, 이 중에서 급여지출을 제외한 407조 원을 운용하고 있다, 이는 2014년 정부 예산 357조 원을 넘는 것이고, 2013년 기준 한국 GDP의 34.3%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또한 국민연기금은 올해 네덜란드를 제치고 일본, 노르웨이의 공적 연기금과 함께 세계 3대 공적연기금이 되었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적립금은 2043년에 무려 2,561조원에 이른다. 한국에서 국민연금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이 1988년이고, 독립적인 자산운용을 시작한 것이 1999년인 점을 고려하면 이런 성장속도는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문은 바로 금융투자 부분이다. 현재 국민연금은 전체 적립금의 99.8%인 406조원(시가 452조원)을 금융부분에 투자하고 있으며, 국내채권에 57.2%, 국내주식에 17.5%, 해외투자와 대체투자에 25.3%를 투자하고 있다. 특히 국내채권투자는 2003년에 최대 91.3%를 차지했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언제나 연기금의 최대 투자자산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즉, 왜 국민연금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대량의 국내채권을 구매했고, 왜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점차 그 비중을 줄이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한국의 복지체제가 금융위기를 매개로 어떻게 함께 진화해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은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금조달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화·만기불일치로 인한 재벌과 종금사의 자산-부채관리의 부실화였다. 이는 발전국가체제에서 행해진 은행을 통한 편법적 대출관행, 그리고 회사채 시장의 비정상적 운용이라는 관치금융의 산물이기도 했다. 즉, 자금을 조달받기 위한 주체가 채권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리스크 평가기준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런 평가기준은 지구적 자본시장에서 활동하는 금융자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인데,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서 이런 평가 기준을 제공하고 화폐의 부채화를 추동한 것이 바로 국채였다.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10년 만기 국채의 이자율이 현재 세계 금융시장의 벤치마크로 작동한다는 것은 가장 안전한 신용화폐의 금리와 수익률 곡선이 다양한 만기를 지닌 다른 자산들의 가격을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지구적 자본시장에서 활동하는 투자자들에게 시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 국채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관치금융의 결과 3년 만기 회사채가 자본시장의 벤치마크로 작동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금융선진화를 위해서, 또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대량의 국채를 발행하고 지구적 자본시장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국채시장을 형성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는 투자부적격 수준의 신용등급을 받았기 때문에 채권자를 찾기 어려웠다. 그때 정부는 일종의 내부거래를 고안했는데, 세계은행이 차관제공을 대가로 요구한 연기금의 자율적 자산운용과 맞물려 국민연금이 국채의 30-40%를 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연금제도의 보편화를 위해 1999년부터 도시지역 가입자를 국민연금 적용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단 1년 만에 기존 가입자 712만 명을 1,626만 명까지 늘렸다. 따라서 막대한 적립금이 축적되었고, 이를 채권시장 형성에 충분히 활용하는 전략은 정부의 국채 이자비용부담을 덜어주는 효과와 더불어 외환위기를 극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새롭게 출범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국민연금과 국채시장의 동맹은 지속되었다. 당시 서울 파이낸셜 포럼으로 대표되는 모피아는 대통령 인수위의 동북아경제허브전략을 동북아금융허브로 전환하는데 압력을 가했고, 실제로 2003년에 금융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채택한 동북아금융허브 추진전략이 정부에 의해 완성된다. 당시 정부가 내세운 7대 과제는 모피아가 문서로 제시한 전략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으며, 세부 전략으로 제시된 우선적 과제 중 하나가 장기채권시장의 선진화였다. 이전처럼 정부는 국민연금이 장기국채발행물량을 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막대한 양의 국채를 발행했다. 그 결과 2002년 66.7%였던 국민연금의 금융투자비중은 2007년에 99.7%까지 증가했고, 국채투자 역시 19.1%에서 최대 50.5%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가부채가 급증하고 발생주의 회계를 적용한 새로운 정부회계기준을 시행하면서 재정건전성 문제가 대두된다. 특히 새로운 회계기준에 따를 경우 각종 연기금이 연금충당부채 항목에 들어가 정부의 재정건전성에 악영향을 주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연기금들 자체가 금융수익률을 증대시키거나 연금제도 자체를 개혁해 연금급여를 삭감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 국민연금은 안전자산인 국채투자보다 고위험자산에 해당하는 주식·해외·대체투자 비중을 서서히 늘렸고, 전문적인 투자기관에 자산을 위탁해 운용하는 비중 역시 증가시켰다. 또한 국가가 고용주인 공무원 연금은 우선적인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적 연금들의 급여 및 소득대체율의 하락과 재정고갈 위험이 증가하자 퇴직금 제도를 완전폐지하고 퇴직연금을 활성화하려는 조치 역시 추진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국민연금과 국채시장의 동맹, 그리고 연기금의 자산운용전략은 금융위기를 매개로 한국의 복지체제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대한 의존성을 심화시켜 온 과정을 보여준다. 즉, 국민들이 납세자로서 막대한 국가채무를 짊어짐과 동시에 투자자로서 금융적 축적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연금이 사회적 연대를 구현하는 제도가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연대와 투자자로서의 연대를 결합시켜 신자유주의적 금융질서를 강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으며, 노후생활의 불안정성을 오히려 증가시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런 복지체제와 금융적 축적의 결합이 과연 금융위기의 여파를 지속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에서 지속 가능할까. 오히려 파국으로의 길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이제 국민과 투자자들의 연대가 아니라 계급 적대의 공간으로서 연금정치를 사유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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