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판수 / 사회학과 박사, 인천대 중국학술원 HK 연구교수


  본 기획에서는 중앙대 원우들의 학위논문을 통해 다양한 학문분과 원우들의 연구내용을 소개함으로써 해당 학문분과의 연구 동향을 알리고 그 분야의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한다. 또한 그 논문이 고민하는 쟁점들을 위한 토론의 공간을 마련한다. 이번 호에서는 사회학과 김판수의 박사논문 <중국 혁명과정에서 공산당-대중 개조체계의 형성과 변화>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혁명, 당, 대중

김판수 / 사회학과 박사, 인천대 중국학술원 HK 연구교수

  이 논문은 당-대중 개조체계를 통해 공산당이 중국 혁명 과정에서 어떻게 대중을 정치적 주체로 변화시킴으로써 권력을 확장하고 또 공고화할 수 있었는지 분석한다. 중국 혁명의 의미는 단순히 공산당의 대중 동원을 통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승리 및 1949년 ‘신중국’ 성립 등에 머물지 않는다. 공산당은 1948년 이전까지 자기 완결적 주체가 될 수 없었고 특히 스스로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정치 집단이었다. 이 때문에 공산당은 대중을 정치적 주체로 만들고 또 의존하여 관료주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고, 관리 가능한 역량 내에서 지속적으로 대중 정치를 급진화했으며, 이를 통해서만 혁명적 정신을 견지하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국 혁명 경험을 통해 우리는 대중 정치를 배제하고 억압함으로써만 지배 권력을 유지하려는 오늘날 중국의 당·국가 중심의 권위주의적 통치 프레임의 한계를 비판할 수 있고, 또 현대 중국 사회의 민주 문제를 변혁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실천적 대안들을 모색할 수 있다.

농민 동원과 대중노선 접근의 한계

  이를 위해 중국 혁명 과정에서 대중의 역할을 대상화했던 두 가지 시각인 농민 동원과 대중노선의 한계를 비판할 필요가 있다. 첫째, 동원 시각은 농민을 공산당의 권력 확장을 위한 도구만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혁명 과정에서 ‘대상화된 농민’이 어떻게 ‘주체화된 대중’으로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물음 자체를 배제한다. 둘째, 대중노선은 당이 인민의 요구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와 당이 인민을 위한 최선의 것이라고 결정한 사항을 곧 인민들 스스로 진정 원하는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실천들이다. 즉 대중노선은 대중 정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두 접근에 근거하여 많은 연구자는 공산당이 1949년 혁명 성공 이후 무리한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중을 도구적으로 소모했고, 반우파운동·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등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비참한 결말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기 공산당의 대중 동원은 기층으로 갈수록 반드시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당 조직의 위계적 명령을 비판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정치가 존재했으며, 사회주의 시기 지식인들은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고 사회 민주를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다. 또 문화대혁명 시기 대중의 자율적 조직화와 아래로부터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은 인민해방군이 정치화된 대중을 대규모로 학살한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 시기 대중 정치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것은 중국 혁명 연구에서 농민 동원과 대중노선 접근이 과도하게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한 쪽에서는 공산당이 혁명 과정에서 권력을 독점했기에 사회주의 시기 대중을 더욱 손쉽게 도구화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기존의 시각을 모호하게 긍정한 상태에서, 1949년 이후 정치사회적 모순 및 사회주의적 경험만을 중심으로 대중의 자율적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변혁 흐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공산당이 혁명 과정에서 농민 동원과 대중노선을 통해서만 권력을 독점하고 대중을 대상화했다면, 왜 사회주의 시기 대중의 자율적·조직적 저항은 그토록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는가?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 동원된 대중과 그에 저항하는 대중 간의 각축은 계급, 지역, 파벌 등의 요소와 착종되면서 무수한 정치사회적 갈등들을 양산했다. 특히 이 문제들이 격화된 것은 위로부터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발단을 마오쩌둥과 소수의 급진적 지도자들의 사상·발언 및 권력다툼 등으로만 치부한다면, 당시 대중에 의한 자율적 조직화의 신속성, 전국성, 지속성 등은 물론 당 자체를 파괴하고 새롭게 건립하기 위한 목숨을 건 저항의 의미를 담아낼 수 없다. 더구나 문화대혁명 이전의 사회주의 경험이란 대개 위로부터의 동원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중국 사회주의 시기 대중 정치의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혁명 과정에서의 당과 대중 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혁명 과정에서 공산당은 권력의 독점뿐만 아니라 권력의 사회화도 추구했었고, 이는 대중 동원·대중노선과 다른 시각을 통해 분석되어야만 하며, 그 역사적 경험이 직간접적으로 사회주의 시기 제도들에 배태되었음을 밝혀야 한다.

혁명 과정에서 중국 대중의 정치적 역량과 자율성의 중요성

  혁명 과정에서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간부·대중의 자율성을 제고하는 것을 ‘개조’(改造)라고 규정했다. 지도자들은 당·간부·대중이 어떻게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관리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숙고했다. 그에 따른 불확실성 해소 방법, 즉 조직적 관리를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대중 정치를 우선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거의 전 혁명 과정 시기 동안 갈등하고 타협했으며, 나아가 대중의 자율적 정치를 급진화한다면 어떻게 이를 안정적인 통치 구조로 내부화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만약 공산당이 단순히 농민을 동원하여 혁명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이처럼 귀찮고 복잡하며 불확실성이 높은 당-대중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면서까지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공산당은 혁명 과정의 대부분 시기 동안 통치구 내에서 통일적인 지배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특히 당 중앙과 거리가 멀고, 기층 촌락 수준으로 내려갈수록 관리의 불확실성은 높아졌다. 마오쩌둥은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결국 급진적인 대중 정치를 승인했는데, 이를 위해 그는 몇 년 동안 점진적으로 대중 정치의 수준을 높여가며 공산당의 강화된 관리 능력을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당-대중 개조체계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및 아래로부터 위로의 상호의존적인 정치 기제가 형성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마오쩌둥은 스스로 자기개조 할 수 없는 기층 간부를 규율하기 위해서는 결국 대중의 정치적 역량과 자율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 스스로 능력-전문화에 기초한 관료체계를 매우 혐오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거나 일본 및 국민당 통치구 등에 수립된 근거지의 경우 기층 간부의 자율성 이외에 믿을 수 있는 조직적 기제는 거의 없었다. 물론 당 중앙은 기층 간부의 자아비판·상호비판 및 자기수양 기제를 강화하기 위해 정풍운동을 장기간 실시했지만, 결국 대중에 의한 자율적 정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간부를 규율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만 했고, 따라서 대중에 의한 간부 심사·평가를 도입하고 발전시켰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당-대중 개조체계의 안정성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1946년 이후 국공내전이 격화되자, 공산당은 기층 대중이 자기보다 혁명적이지 않은 간부들을 공격하는 것을 방치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까지 대중의 정치적 자율성을 제고할 수밖에 없었다. 즉 공산당 지도자들은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중이 간부를 공격하고 또 살육하도록 장려하는 냉혹한 지배 집단이 되었다. 물론, 1948년 이후 공산당이 더 이상 대중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을 바로 그 때, 당은 대중을 야만스럽고 비이성적인 존재로 낙인찍었다. 즉 혁명 시기 누구보다 더 혁명적으로 공산당의 농촌 지배 구조를 형성하는데 노력한 대중들은 그렇게 다시 ‘농민’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폭력적 ‘개조’ 개념이 등장했다.

  공산당은 혁명 과정에서 ‘혁명 정당이란 어떠해야만 하는가’를 고민했고, 그 방법으로 혁명적 대중의 자율적 정치 필요성을 인식했다. 또한, 이를 실천하고 발전시킴으로써 혁명을 성공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당-대중 개조체계를 통해 공산당은 혁명 과정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반면, 이를 약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시기 비교적 큰 실패를 경험했다. 물론, 혁명 시기의 당-대중 개조체계는 ‘실질적 민주’라는 측면에서 한계는 분명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한국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는 ‘황폐화된 제도적 민주’의 한계를 명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성찰성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중국 혁명 시기의 역사적 경험은 결코 중국만의 예외적이고 특수한 역사로 남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