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 노동당서울시당 사무처장

[복지의 가면: ③ 공동체의 도구화: 지역복지]

 
 

퇴행하는 복지의 알리바이, ‘마을공동체’라는 환상

김상철 / 노동당서울시당 사무처장

  자치 혹은 자조란 공식화된 정부기구의 사업을 자체적인 역량에 기초하여 변형시키는 힘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치와 자조가 프로그램화된 사업으로 제도화 되는 순간 동원과 통제가 자리하고 어떤 획일화된 원형에 맞춰진 척도로 채점되는 대상이 된다. 일례로 새마을 사업이 그렇다. 예의 관제화 된 새마을 운동의 원형에 해당하는 5-60년대 자생적인 농촌 운동에서 마을의 리더들이 주택을 개량하고 새로운 농법을 배워 보급하고 마을 회관 등 마을의 공통적인 공유지를 만들고 협력하는 과정이 자생적으로 있어왔다. 하지만 유신체제가 새마을운동을 프로그램화하면서, 전국적으로 똑같은 시멘트 길, 마을회관과 지붕을 얹은 집들이 복제된다. 역설적이게도 새마을운동은 압축성장체제의 반정립으로 등장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서 반복된다. 박원순 시장은 보궐로 취임한 2011년 12월 마을공동체사업을 위해 마을활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마을공동체만들기 사업을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만들고, 이를 해외에 수출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2012년 마을공동체 육성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2017년까지 마을공동체 1,000곳, 마을활동가 3,000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새마을운동과 마을공동체사업이 반세기의 시차를 넘어 유사하게 반복하는 사태를 통해서 통시적인 맥락을 잡아낼 수 있다. 그것은 국가가 자원을 분배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눈돌리기’의 맥락이다. 마술의 가장 중요한 기술인 눈돌리기는 마술의 속임수를 감추는 기술이다. 최종적으로 마술의 성공여부는 여기서 갈린다. 70년대 유신독재 시기에 국가의 자원은 산업 자본을 중심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고 일관되게 나타난 분배의 요구는 새마을사업을 통해서 돌려진다. 즉, 우리가 못사는 이유는 우리 탓이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 바뀌어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8년 경제위기로부터 파생된 삶의 불안은, ‘무상급식’ 의제에서도 드러났듯, 보편적인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좀 더 분배하라는 요구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응답 역시 마을공동체만들기라는 사업으로 나타났다.

 

 
 

새마을운동이 떠오르는 마을공동체만들기

  물론 지나친 단순화는 위험하다. 하지만 서울시에서 지금까지 추진된 사업의 내용을 보면 이를 옹호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의 사실상 콘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마을공동체위원회의 지난 3년간 논의 과정을 살펴본 결론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서울시가 제시한 계량적 목표의 달성여부로 자치구에 제공하던 인센티브 사업에 대한 태도다. 어떤 구에 마을공동체네트워크를 구성했는가, 마을공동체 발굴이 몇 개 이뤄졌는가 등과 같은 목표달성 여부에 따라 수십억에 달하는 재원을 나눠주었고 결국은 비슷한 유형의 마을사업, 마을공동체가 양산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마을공동체위원회는 “총괄적인 성과목표와 성과지표를 주민 체감적으로 언어화하고, 계량적인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측정할 수 있는 수준의 마을공동체사업을 주문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초기 ‘주민의 자치역량’ 발굴에 초점을 맞추고 마을의 문제점을 도출하도록 유도했던 흐름이 점차적으로 행정의 필요에 따른 도구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마을공동체사업은 다양한 형태의 마을공동체 구성에 초점이 맞춰졌으나 기본적으로는 복지사업이었다. ‘희망온돌사업’으로 대표되는 이 사업은, 기존의 복지전달체계를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자원봉사단체를 통해 우회하면서 시행된 사업이다. 그래서 서울시 마을공동체위원회의 위원 구성 역시 복지 전문가가 2명 포함되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은 2013년 하반기에 급속하게 전환된다. 갑자기 안전마을이라는 의제가 등장하고, 아파트마을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기존 마을공동체 논의를 압도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의제의 변화가 마을공동체사업이 진행되는 현장, 즉 마을의 요구에 부응한 변화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마을공동체사업 중 복지 지원이라는 사업의 방법론이 마을공동체 역량의 강화라는 주체적인 요구의 전략이 아니었듯이 새로운 안전마을이라는 의제로의 재편은 복지를 포괄하는 방법의 전환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체에 가까웠는데 그 대체의 과정에서 마을공동체사업 지역 당사자들의 필요는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복지마을에서 안전마을로의 전환에 대한 필요성은 주민의 요구라기보다는 행정의 요구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서울시 행정에 있어 안전, 좀 더 구체적으로 치안의 문제는 뉴타운 중심의 도시재편을 벗어나고자 하는 행정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치안의 문제는 경찰의 일이고 이에 대해 서울시와 같은 지방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방식,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존의 치안-권력관계에 파열음을 낼 의지가 없는 지방정부의 입장에서 이를 우회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물론 서울시에서 말하는 안전마을은 치안을 넘어서는, 소위 사회보장까지 포괄하는 안전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최근 편의점을 긴급 피난처로 활용하기로 한 사례나 안전귀가 서비스와 같이 가시적인 사업은 치안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이 추구하는 마을공동체란 것이 새로운 권한을 부여받는 과정이 아니라 행정의 일을 대신 수행하는 단위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마을공동체사업이 현대 자본주의국가에서 가지고 있는 공시적 특징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와 국가의 문제를 우회하는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카메론은 “큰 사회(big society)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이것은 영국정부의 사회 비전으로서 ‘큰 사회론’이 제시된 배경이 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야기한 불만은 대부분 시장의 지배적 행위자인 기업의 탐욕으로 돌려졌다. 기업의 실패를 정부와 시민이 공동으로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전 세계적인 분노가 터졌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은 기업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보수당 정권의 내각 보고서는 “큰 사회에게 권력을 넘기라는 것은 공동체에 더 많은 권력을 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 또한 공동체가 폐쇄위기에 있는 지역의 시설과 서비스를 구하고 지방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서비스를 인수할 권리를 갖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역사회조직가의 새로운 세대를 훈련하고 전국의 근린 그룹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공급하는데 실패한 공적 서비스를 사회적 기업, 자선단체 등이 시행할 수 있도록 은행을 설립하고, 제3섹터 시장의 주요 행위자로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며, 5,000명의 공동체 리더 양성을 골자로 하는 근린 단체 활성화 방안을 추진했다.

  즉, 세금을 더 많이 걷어 기업의 실패, 정부의 무능으로부터 시민들을 구제하기 보다는 기업의 실패와 정부의 무능에 상관없이 시민들 스스로가 버텨낼 수 있기를 요구한 셈이다. 서울시의 마을공동체만들기 사업이 이와 다를까. 오히려 서울시의 마을공동체사업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제3섹터에 대한 관심과 호응하는 부분으로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우회하는 지점, 좀 더 정확하게는 시장의 조정자로서 국가 기능을 포기하는 지점에 있어 유사점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복지는 이웃 간의 상호부조로 전환되고, 빈곤에 의한 이웃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지역공동체의 무관심이 빚어낸 책임으로 부각된다. 그리고 리처드 세넷이 적절히 지적했듯, ‘서로에 관해 모든 걸 안다고 상상하며 서로가 똑같아져야 한다’고 믿는 공동체의 환상이 시민들의 자기 윤리로 내재화된다.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이 제대로 되려면 시민들의 공동자산인 행정과 재정에 대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마을공동체사업은 주민들이 사업 제안서 쓰고, 기획안 발표하고, 영수증 잘 모아서 회계보고를 하는, 시민의 행정화에 불과했다. 기업의 탐욕, 시장의 실패, 정부의 무능이 시민의 ‘자책’으로 귀결되고 있고 그것의 한 자락이, 의도여부를 떠나서,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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