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희 / 비교민속학 석사


  본 기획에서는 중앙대 원우들의 학위논문을 통해 다양한 학문분과 원우들의 연구내용을 소개함으로써 해당 학문분과의 연구 동향을 알리고 그 분야의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한다. 또한 그 논문이 고민하는 쟁점들을 위한 토론의 공간을 마련한다. 이번 호에서는 비교민속학과 최성희 석사 논문 <서울 백사마을 여성 공동체의 형성과 변화>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서울 백사마을 여성 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최성희 / 비교민속학 석사


  <서울 백사마을 여성 공동체의 형성과 변화>는 도시마을의 사례로서 백사마을을 다룬다. 백사마을(이하 104마을)의 백사(百四)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본동 산 104번지에서 유래한다. 정확한 범위는 중계본동 1-8통이며, 본 연구에서는 전면적인 재개발이 진행되는 1통과 2통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104마을은 서울과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 주소지 그대로 서울 외곽의 불암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재개발 절차가 진행되면서 최근 ‘마지막 달동네’로 뉴스, 신문 등에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104마을은 전형적인 도시마을의 사례로서 인간관계의 형태로 볼 때 농촌공동체의 성격과 도시공동체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혼재된 특징을 보인다. 즉, 도시와 농촌의 중간적인 형태의 도시 속 농촌으로, 실제로 지역 주민 중 일부는 104마을을 “시골”, “도심 속 시골”, “제2의 고향”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편, 서울시 주거환경과에서 주관하는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대회’ 공모전이 올해로 5회째 열리기도 하는 등 최근 들어 마을공동체적 가치가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렇듯 각 도시에서는 지역주민들을 하나의 마을공동체 구성원으로 묶어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마을공동체를 지역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104마을은 2016년 재개발 준공을 앞두고 있으며 최근 들어 5분의 1가량의 저층 주거지가 보존되는 실험적인 재개발 방식으로 언론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본 연구는 104마을 내 마을공동체의 특성을 직접 현지에서 지역주민들과의 인터뷰, 참여관찰을 통해 질적으로 연구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마을 내에서 여성 중심의 소규모 모임의 형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변화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분석했다. 즉, 도시마을에서 문화 전승집단으로서의 여성 공동체의 특징과 기능은 어떻게 나타나며 여성 공동체가 재개발과 이주라는 역사적 사건에 따라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지 현지조사를 진행했다. 여성 공동체의 형성과 변화과정이 마을 내 변화 속에서 어떻게 맞물려 들어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104마을에 거주 중인 자료제공자 A, B, C를 인터뷰하고 참여관찰하여 조사했다.

  먼저 A(여, 69세, 중계본동 1통 거주)는 충남 천안 출생으로 1975년경 104마을로 이주했다. 당시 A의 남편을 비롯한 마을의 남성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비정기적으로 건설 현장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여성들은 가사, 육아, 요꼬(가내 방직일), 텃밭일, 기타 생업 등 직접적인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했다. 여성들만 남게 된 마을에서 그들은 남편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해외 건설 사업장에서 송금해온 임금을 바탕으로 친목계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1970년대 결성되었고 결성 당시 1통과 2통 여성들을 중심으로 30-40가구의 규모를 이루었다. 1980년대 후반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고 재개발에 대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자 13가구를 제외한 친목계 구성원들은 집을 팔고 외부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지만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결혼, 장례 이외에도 한 달에 두 번 A의 집에서 정기 모임행사를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음으로 B(여, 87세, 중계본동 2통 거주)는 전북 고창에서 출생, 1972년 서울에 상경하여 3년간 이사를 반복하다 49세가 되는 1975년경 저렴한 집을 구하기 위해 104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출부, 아파트 청소로 5남매의 양육을 도맡아야만 했다. 1994년(당시 68세) 일을 그만두기까지 B는 이웃들과 교류할 여유가 없어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그러다 일을 그만둔 후 1990년대 70세가 다 되어서야 교류가 이어졌으며, 당시는 B가 거주하는 인근의 많은 이웃들은 재개발 소문에 대한 여파로 외부로 이주를 나간 후였다. 2000년대부터 인근에 빈집이 많아진 2통의 골목을 넘어 3통 골목의 이웃 4-5명과 매일 오후 3시에 암묵적인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B의 공동체는 친분을 바탕으로 한 친목과 여가를 위한 모임이다.

  마지막으로 C(여, 77세, 중계본동 2통 거주)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1960년 서울 돈암동 판자촌에 정착했고 1968년 도심환경정비사업으로 판잣집이 예고 없이 철거당하자 지금의 104마을 2통 천막촌에 강제 이주되었다. C의 살림살이들은 쓰레기차라고 불리는 덤프트럭에 실려 불암산 자락 시유지에 운반되었다. 104마을에 강제 이주된 약 1,135가구 가운데 몇몇은 열악한 천막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기도 했으며 C는 천막살이 경험을 공유하는 이웃 여성들 3-4명과 매일 점심식사를 함께 하거나 TV를 보고 먹을 것을 나누며 공동체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1990년대까지 부녀회가 존재했으나 2000년대 구성원들의 이주로 인해 부녀회가 해체되면서 2통에 위치한 중계본동 복지회관의 “할머니방”에서의 모임도 점차 와해되어 왔고 현재 이들은 모임이 없어졌다는 일종의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여성 공동체의 구성원 A, B, C는 모두 출신지가 상이하며 1967년 강제 이주됐거나 저렴한 주거지를 구하기 위해 104마을로 이주해왔고 도시 속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해가고 있었다. A, B, C 여성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생애사와 104마을의 변화를 통해 여성 공동체 모임의 형성배경, 유지 원리, 강제 이주와 재개발에 따른 영향, 이웃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외부 구성원 간의 상호관계, 마을 내 구성원들 간의 관계 등을 알 수 있었다.

  104마을 여성 공동체는 1970-1980년대의 시대적인 배경과 당시 남성들의 생업적 특성이 여성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애사와 맞물려 들어가면서 형성되었다. 구성원들은 1970-1980년대 주거, 전기, 수도, 교통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빈곤을 경험했으며 열악한 주거구획과 공동 우물, 빨래터, 공동화장실의 공유는 A, B, C의 지역주민들 서로에게 있어 공동체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여성 공동체를 유지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다. 특히 여성들의 역할이 가사, 육아, 부업, 마을 내의 사회적인 관계에서 강조되는데 남성과 여성의 마을공동체 내에서의 역할분화는 전통적 어촌 공동체와도 비교해볼 수 있다. 남성들이 어업으로 마을을 비우게 되었을 때 가사, 육아, 밭농사를 비롯해 갯벌에서의 채취, 사회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와 비교해 A, B, C의 사례에서도 살펴보았듯 한국현대사회의 시대적인 배경 아래에 형성된 도시마을 중 104마을의 여성 공동체는 더불어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생존방식이다.

  1980년대 후반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됨에 따라 집값이 오르고 투기꾼들이 오가게 되면서 104마을의 여성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2013년 지장물 조사가 끝나고 2016년 재개발 준공완료를 앞둔 상황인 2014년 현재, 대부분 65세 이상의 노인인 이들은 친목, 여가, 생존을 위한 여성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지자체별로 도시 속 마을공동체의 가치가 강조되어 가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104마을의 여성 공동체의 형성과 변화는 그 자체로서 서울이라는 도시의 발달과 이촌 현상, 도시마을의 형성과 맥락을 함께하고 있다. 

ⓒ 시사인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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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인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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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통 골목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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