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식 / 사회진보연대 회원

자본주의적 복지국가의 불가능성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모델로 제시돼왔다. 한국에서의 복지 또한 권위주의, 민주화, 신자유주의 세력 가릴 것 없이 나름대로 주류적 패러다임으로써 지속·안정적으로 성장해왔다. 의회나 지방자치단체장, 교육감 선거 등에서도 복지는 핵심적인 정치 쟁점이 되었고, 여러 정치적 장을 통해서 소비/재생산되며 국민들에게도 친숙한 것이 됐다. 그동안 정당정치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주로 논의됐던 것이 노동이나 외교, 안보 등이었다면, 근래의 복지를 향한 상대적인 쏠림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진보정치의 소유물로 인식되는 복지가 정치적 이념과는 별개로 거의 모든 정치 세력에게 필요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 또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현상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곤란함만큼이나 복지국가 그 자체도 논쟁의 대상이다. 복지국가라는 것이 이전의 국가와 어떤 차이를 갖기에 한국의 의회정치인, 시민사회단체들은 이토록 복지국가 건설을 희구하는 것일까.

복지국가, 자본주의 국가의 또 다른 정세적 형태


  필자가 생각하기에 일반적인 국가에 대한 이해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기능적 분화를 이어왔으며,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대하는 자연상태의 극복을 목표로 인민들에 의해 상상적으로 계약된 일반의지의 구현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정치적 혼란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되는 지역에서 주로 탄생해왔다. 대표적으로 로크의 정치철학 즉, ‘의식과 소유의 인간학’은 의식과 소유에 근거한 개인을 명명했다. 이때 소유는 자연적 권리로써 승인된다. 자연상태로서 시민사회 그리고 공통의 재판관으로서 국가라는 관념으로부터 시민은 소유자이며 국가(commonwealth)는 소유자 공동체가 된다. 이러한 소유자들의 법적·도덕적 공동체의 추상성·형식성에 대한 대응으로 정념적 동일성에 기초한 민족형태가 고안된다. 일종의 집단적 가상에 대한 공동소유인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윤리에 기초해서 근대국가는 가족과 시민사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고, 인민은 민족에 봉사하려는 욕망을 진정한 자유로 승인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국가의 정치철학적 기초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국가에 대한 정치철학적 논의들은 좀 거칠지만 복지국가의 로직들로 연결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복지국가는 유럽식 코포라티즘 혹은 사민주의적 코포라티즘이라는 토대로부터 마련돼왔다. 여기서 국가는 공동선을 상징한다. 이 때문에 국가는 사회의 상이한 기능적 집단들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코포라티즘은 체제 내에서 이익의 갈등을 비강제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과 같은 외양을 띤다. 한정된 비경쟁적 집단들이 국가에 의해 허가를 받거나 국가에 의해 창설되며, 각각의 집단은 자신들의 대표자 선출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다. 이러한 틀 내에서 계급들은 비경쟁적 집단 또는 이익 지향적 조직에 흡수되고 노동조합들은 경제정책 결정에 통합되며 그 대가로 임금정책을 수용한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일체감을 제한하여 정치적 행동을 제한하고 산업적·기업적 행동, 행정적 활동에 종속시킨다. 여기서 이해되는 국가는 일종의 중립적 국가이며 도구론적으로 귀결돼 ‘선거-집권을 통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관념이 인정된다. 이 틀 속에서 사민주의 정당의 집권과 강력한 산별노조를 바탕으로 노사정 삼자 합의 방식을 통해 노동자들의 물질적 이해를 실현해 복지국가라 불리는 것이 건설될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사민주의적 코포라티즘적 시각에서 국가는 중립적·일반적 이해를 추동하는 도구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국가 혹은 국가장치에 대한 몰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풀란챠스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관계가 경험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강조한다. 일종의 도구론적 인식 즉, 자본가계급의 엘리트가 국가관료나 정치지도자가 돼 국가를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는 밀리반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국가관료의 계급적 출신이 국가운영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서 국가는 객관적·물질적 기구로서 국가의 생산관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자본축적을 뒷받침하는 구조적 특징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가는 경제에 의해서 결정되는 외적 대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구성하고 그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자본축적은 언제나 일정한 자본형태와 국가형태(경제 및 사회정책의 조합)의 통일적 과정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사민주의자들이 코포라티즘적 전략의 일환으로 복지국가 건설을 대안으로 내세웠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토대를 결코 벗어날 수 없으므로 복지국가라는 정세적 형태의 국가체제 또한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복지의 확대가 곧 간접임금의 증가이고, 그것이 설령 직접임금의 일시적 상승에 기여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조적 모순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과정은 두 가지 특수한 상품 즉, 화폐상품과 노동력상품에 대한 국가관리를 전제로 한다. 국가는 두 가지 특수상품을 성공적으로 재생산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으며, 국가가 화폐형태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화폐형태가 온전히 그것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수적이다. 국가가 소유한 화폐주권은 공식적인 화폐와 그것의 시세를 결정하며 중앙은행이라는 경제적 국가기구를 통해 사적 신용화폐, 국민통화, 국제화폐의 교환 및 조절의 기능을 행사함으로써 자본축적에 기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력은 언제나 고용의 불안정성을 전제로 판매·구매된다. 하지만 그러한 고용의 불안정성은 축적의 재생산을 위협할 수 있는데, 가능한 한 저렴한 노동력의 항구적 공급의 중단 가능성이 그것이다. 이는 임금이 노동력의 사회적 필요노동으로 결정되며 그것의 가치가 재생산가치에 미달하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노동력 관리를 위한 국가 및 가족이 요구되며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의 과정은 국가에 의한 화폐와 노동력의 관리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쌍두 독수리’의 유비처럼 국가와 자본은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서로 한 몸을 이뤄왔기 때문에 복지국가는 결코 기존의 체계에 대한 대안일 수 없다.


골참육단, 위험한 환상


  중심부 국가들이 세계 경제의 일정한 물질적 성장 즉, 안정적인 개량과 개혁의 토대 위에서 복지국가를 마련했지만, 결국 70년대 경제위기로 복지국가의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개조를 경험한다. 대다수의 사민주의 정당들 또한 ‘제3의 길’, ‘새로운 중도’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노선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80년대 이후 서구에서 나타난 사회적 합의 기구 및 협약들의 외형적인 절차와 형식은 이전 사민주의적 유형과 비슷하다 할지라도, 그 실질적 내용은 노동의 열세라는 지형 아래에서 자본이 헤게모니를 쥐고 신자유주의적 개혁들을 관철하는 것으로 전화되었다. 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도 ‘생산주의-복지 자본주의’라든지, ‘공급주의 복지’라 규정되고 있으며 실제로도 경제정책의 우위 아래에서 사회정책이 결정되거나 노동 유연화라는 큰 틀의 합의 속에서 생산연계복지가 이뤄지고 있다.

  복지국가는 근대 국가와 결합한 자유주의가 봉기의 권리를 법·제도 내부로 억압했듯이 노동권, 나아가 노동의 권리까지 체제 안으로 재-제도화하는 기획이다. 물론 일련의 복지들 즉, 의료비, 보육비, 기초생활보장 등은 삶의 절실한 문제이며 현실화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복지국가라는 기만적 환상 속에서 눈을 감고 복지가 중요하다는 말만 반복한다면 이는 뼈를 내어주고 살을 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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