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구는 요한복음서 20장 24-29절이다. 사도 토마스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그의 부활을 믿지 않다가 예수의 손과 옆구리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나서야 부활을 믿게 된다.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예수가 토마스의 믿음을 단순히 질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가 죽고 나서 토마스가 얼마나 슬프고 두려웠을까?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지만, 토마스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예수의 말이 오히려 “미래의 신도들은 기쁠 것이다. 네 덕에 그들은 보다 더 의심 없이 믿을 것이다. 너는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너를 그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너에게 내 구멍을 보여주어서 미안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부님의 강독 시간이었다. 신부님은 토마스 얘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토마스 생각만 했다. 성당에서 집에 오면서 이제 성당에 가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감탄하는 것은 집에서 해도 된다. 성당은 그런 곳이 아니다. 거긴 해석하는 곳이 아니다. 듣는 곳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황이 방한했다. 평소에 성당 좀 다녔으면 교황 미사에도 초대 받았을 텐데. 잠깐 아쉬웠다. 하지만 이내 교황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보다는 사람들이 교황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만나지 않아도 이미 만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론 때문인가? 교황이 우리들의 삶을 다 둘러싸고 있었다. 교황이 떠났다. 종교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싶었다.
  인문학이나 예술이 단순히 기성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말뿐인 말을 설파하지만 이를 통해 변혁을 꾀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유수의 논객들이 세월호 참사가 안전 대신 이윤을 선택한 결과이며, 총체적 안전 관리 시스템을 뜯어 고치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고 해서 총체적 안전 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바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정권은 바뀔 것이고, 계속해서 우리는 이윤 대신 안전이라는 말을 부르짖을 것이고, 변혁을 꾀하기 위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논객들의 말은 절대 듣지 않는다. 그럼 누구의 말은 듣는가? 실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이제 논객들, 비평가들의 말들은 수사를 위한 수사이며 그들만을 위한 옳고 그름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수사를 위한 수사는 흥미로운 수사인가? 비평은 자신의 지난한 반복 속에서 수사적 즐거움마저도 잃어버리고 있다. 여기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겠다. 필자는 작년 하반기부터 본지 논평 코너에서 비평, 메타비평의 과잉, 한계, 모순에 대하여 여러 차례 밝혔다. 딱 한 번만 더 묻고 싶다. 사람들은 정말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거나 영향 받지 않고, 믿지 않으며, 행동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생각보다 정치인의 말을 잘 듣는다. 듣는다는 표현 대신 믿는다는 표현을 써야할 것 같다. 지켜지지 않을 공약을 잘 믿는다. 사람들은 늘 그래왔듯이 교회나 절에서 하는 얘기를 잘 듣는다. 믿는다. 절에 다니는 인구가 50%에 육박하는 나라에 교황이 방문해서, 고통 앞에 중립이 없다는 발언을 했다.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대단히 감동 받았다. 성당에 다시 다녀야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마치 투표만이 행동이라고 하면서 행동을 촉구하면 사람들이 다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투표를 한다. 마치 종교와 같다. 지난한 반복과 새로운 시스템, 안전한 시스템을 상상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종교에게서 뭔가를 학습해야 할 것 같다. 만약 예술이 가상의 구제를 통해 가상의 세계를 그저 상상하는데 그쳤다면, 가상 그 자체인 종교적 세계관은 그것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상의 구제를 예술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사용했다. 예를 들어, 가톨릭은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자신들의 세계관을 몇 군데 수정해왔다. 가톨릭은 자신들의 가상을 수정하는 일이 대단한 변혁처럼 보이게 포장했다. 만약 가톨릭에서 동성애를 허용한다면, 사람들은 난리가 날 것이다. 분량이 끝났다. 다음호에 이어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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