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언 / 시인

던전이라는 형식

■로그라이크 형식의 게임
■로그라이크 형식의 게임

  여느 예술 작품들이 그려내는 세계가 그렇듯이, 게임도 정확히 세상을 참고한다. 게임의 소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풍경만큼 다양하다. 총잡이들이 있는 황금광 시대의 북아메리카 서부, 초대형 모함이 순항하는 끝없는 우주, 은둔 고수들이 무공을 겨루는 무림, 혹은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와 똑같은 도시. 하지만 아마도 게임에서 가장 많이 소재로 삼은 것은 중세 시대, 그중에서도 특히 던전일 것이다.
  던전의 사전적 의미는 옛 성채에 딸려 있던 지하 감옥이지만, 오늘날 던전을 사전적 의미로 읽는 사람은 드물다. 게임 속의 던전은 숱한 괴물들이 보물을 지키는 미로이다. 던전의 세 가지 요소는 다음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어두침침한 미로, 몬스터와 함정으로 구성된 난관, 그리고 보물. 그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면 벽돌로 만들어진 지하 미로이든, 동굴이든, 숲이든 모두 던전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던전의 이미지를 처음 만든 것은 TSR의 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인 <던전스 앤 드래곤스>(1974)이다. 톨킨의 판타지 세계를 참고한 이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은 드래곤이 보물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둔 복잡한 미로로서의 던전이라는 이미지를 창조했다. 이후 던전은 수많은 게임에서 보물을 노리는 모험가들의 주 무대가 되었다.
  던전은 하나의 완결된 선형적인 형식이다. 하나의 던전은 하나의 입구와 하나의 보스, 하나의 보물을 가진다. 흔히 던전에 대비해 필드라고 불리는 개방된 공간의 경우 플레이어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동시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던전은 다르다. 많은 던전은 이미 알려진 보상과 적이 있으며 플레이어-모험가는 보상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던전으로 들어간다. 또한, 던전은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지 않으며, 바른길은 보통 하나뿐이다. 이는 던전이 드넓은 바깥에 대해 상상하기보다는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 안의 내용에 고심하는 요소라는 걸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던전은 질서적이다. 규칙 없는 던전은 없다.
  이러한 제한적이라는 던전의 특징은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던전이 주요 콘텐츠로 활용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물론 중세 판타지에서 긴장감 있는 모험을 그리는 데 던전 만한 무대가 없는 까닭도 있었지만, 하드웨어와 프로그래밍의 기술적 한계 또한 필드가 아닌 던전이 게임의 주 요소가 되었던 까닭으로 들 수 있다. 필드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건이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드넓은 세계를 구현해내야 했는데 과거의 기술과 인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에 던전은 통제할 수 있는 형식이었기에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던전의 레벨 디자인만 고려하면 되었다.
  모험가들에게 특정 던전의 보상과 적이 알려졌다고 해서 그 내부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다. 던전은 항상 어두침침하며, 다음 방에서 뭐가 나올지 예상하기 어렵다. 언제나 다음 방, 다음 길은 어둠으로 가려진 미지이다. 이러한 던전 내부의 미지적인 면을 가장 잘 이용한 스타일의 게임은 로그라이크이다. 로그라이크는 1980년 마이클 토이와 글렌 휘치먼이 만든 <로그>와 유사한 게임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그>는 지하 던전을 내려가면서 적을 죽이고 보물을 얻고 성장해나가는 스코어링 게임인데, 비록 아스키 부호로 구현한 것이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던전을 표현한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이며, 리얼타임이 아닌 턴 기반이긴 하지만 최초의 액션 롤플레잉 게임이기도 하다.
  <로그> 및 로그라이크 게임은 공통으로 다음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던전은 매 층마다 랜덤하게 생성된다. 둘째, 캐릭터가 죽으면 되살릴 수 없고 영구히 죽는다. 즉, 삭제된다. 이를 페르마데스(Perma-death)라고 한다. 매 게임 던전이 새롭게 생성되기 때문에 다음 층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한 번 죽으면 끝이라는 점 때문에(더불어 마니악한 유저들 특성상) 로그라이크 게임 대부분은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로그>는 로그라이크라는 이름대로, 아마추어리즘을 극대화한 독자적 게임 스타일을 공유하는 장르의 게임들(대표적으로 넷핵, 앙그반드, 던전크롤 등)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메이저 롤플레잉 게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울티마 온라인>, <리니지> 등의 초기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들에서 플레이 도중 사망할 경우 소지하고 있던 아이템을 분실하는 패널티 개념은 페르마데스의 약화된 재현이며, 1,000층까지 있는 던전을 탐험하는 고전 게임 <신의 진노 게끼린>은 로그라이크 게임을 가볍게 만든 케이스이다. 특히 블리자드 사의 대작 <디아블로> 같은 게임들에서 보이는 랜덤 던전 생성, 랜덤 유니크 아이템, 하드코어 모드 등은 직접적으로 로그라이크 게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로그라이크 장르 특유의 매력으로 인해 마니아층이 있는 만큼, 로그라이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장르의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은 역시 <던전크롤>의 개량판인 <스톤수프>이다. 수십 개의 종족, 클래스를 조합해 만든 자신만의 캐릭터로 던전 깊숙한 곳에 숨겨진 조트의 오브를 찾아 던전을 탈출하는 게임인데, 속도감 있는 전개와 다양한 탐구 요소, 도전 욕구를 고취하는 난이도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받고 있다. 모바일 앱 시장에서도 로그라이크를 표방한 인디 게임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Pixel Dungeon>, <Hell, The Dungeon again!> <Hoplite> 등등이 주목할 만하다. 로그라이크를 퍼즐 스타일로 재해석한 <10000000>이나 <Dungeon Raid> 등도 크게 히트치며 주목받은 바 있다.
  던전을 모험가의 입장이 아닌 던전 주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게임들도 있다.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인 <던전스 앤 드래곤스>부터가 그렇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역할극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컴퓨터 역할을 하는 던전마스터와 플레이어가 대화와 주사위, 펜과 종이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던전을 준비해오는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의 대립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게임을 진행하는 위치에 있는 마스터의 권능은 무한하기에 모두가 즐거운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을 신경 쓴 난이도 조절이 관건이다. 컴퓨터 게임으로는 악마의 시점에서 던전을 만들고 던전에 들어오는 용사들을 물리치는 <던전키퍼>가 히트를 기록하며 던전을 소재로 한 게임의 또 다른 갈래를 이루었다. <각명관>, <둥지 짓는 드래곤> 등도 <던전 키퍼>와 유사한 시점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이다. 최근 국산 모바일 게임 중에서는 <던전에 어서 와>와 같은 게임이 눈에 띈다.
  필드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기술적인 한계가 사라지고, 오랜 게임의 역사 동안 지겹도록 던전이라는 콘텐츠가 반복된 시점에도 왜 여전히 우리는 모험가가 되어 던전으로 들어가기를 자청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앞서 밝혔듯 던전에는 형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드의 극단적인 형태는 우주이다. 우주라는 필드는 무한하기에 형식이 없다. 한마디로 그 무대는 시간상으로도, 형질상으로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곳에 있다. 대부분 게임의 특질은 목표 달성과 성장에 있는데, 바로 우리의 삶의 특질과 일치한다. 우리가 삶에서 어떤 인간이 되기를 원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성장을 거듭하는 것은 우리 삶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구성된다. 모든 형식은 그 안에 죽음을 내재하고 있는 셈이다. 던전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유한하고 폐쇄적인 삶의 구조에 관한 메타포가 된다. 형식 아래에서만 비로소 추동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성취를 갈망하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우리는 유한한 삶의 시간 동안 끝없이 성취를 갈망하지만, 현실에서의 성취는 크게 제한되어 있다. 반면에 게임에서 성취의 자리는 얼마든지 마련되어 있다. 게임은 성취에 대한 중독으로 움직이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던전만 존재하고, 그 안에 아무런 서사도 없는 로그라이크 게임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플레이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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