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혜 / 한예종 영상이론학과 석사

요단강은 흐른다   

  미국에서 법적으로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남북전쟁이 끝난 해인 1865년이었다. 모든 해방의 역사가 그러하듯,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흑인 노예들의 반란은 물론 도주를 돕기 위한 ‘지하철도’와 같은 비밀결사가 있었고, 오랜 시간에 걸친 노예제 폐지 운동과 개헌의 과정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 1807년 노예의 수입 금지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고, 1812년 노예 매매 금지에 관한 법률 채택, 그리고 57년이 흐른 다음에야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이었다. 그러나 1865년 이전의 법률들의 경우 주(州)마다 다르게 적용됐다. 목화나 사탕수수 재배와 같은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주를 이루었던 남부지역에서 노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으므로 여전히 노예 매매가 성행했고, 여러 법적인 제제들로 노예의 수가 줄자 북부의 주에서 납치까지 해오는 상황이었다.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도주를 하거나 노예 신분에서 면제되어 자유인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최근 개봉한 스티브 맥퀸 감독의 <노예 12년>(2014)의 실제 주인공이자, 영화의 원작 수기 <노예 12년>의 저자인 솔로몬 노섭은 주인의 유언장 지시에 따라 자유인이 된 민터스 노섭의 아들로, 1808년 자유인으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33년간 자유인이자 미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던 솔로몬 노섭은 1841년 일자리를 알선해주겠다는 두 명의 백인을 따라갔다가 워싱턴에서 자유인 증명서를 빼앗기고 조지아 출신의 노예로 둔갑되어 팔리게 된다. 이후 12년 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지역을 떠돌며 노예 ‘플랫’으로 살아갔던 솔로몬 노섭은 캐나다 출신의 방랑자 배스의 도움으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이처럼 각 주마다 다르게 적용됐던 노예제에 대한 법률은 자유인이었던 그가 12년간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독특한 비극적 상황을 만들어 냈다. 솔로몬 노섭은 읽고 쓰기에 능통했음은 물론 본인에 따르면 사고방식 자체가 자유인인 백인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솔로몬 노섭은 노예의 삶을 살며 자신을 비롯한 노예들이 견뎌내야 하는 삶의 부당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가 쓴 책에도 이러한 측면이 충분히 반영돼 있다. 또한, 한 번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좀처럼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만큼 섬세한 기억력을 가진 그의 능력은 워싱턴에서 납치된 시점에서부터 12년 후 그의 가족이 있는 뉴욕 샌디힐로 돌아오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인물들과 일화, 지역, 그가 견뎌야 했던 노역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의 수기를 통해서는 물론 영화를 경유한 육화를 통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국 흑인 노예의 삶을 생생히 전해준다. 

 
 

  영화 <노예 12년>에서 극장에 앉아 있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만큼 참혹했던 두 장면이 있다.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에서 광기 서린 교주 역을 완벽히 소화했던 폴 다노가 맡은 목수 존 티비츠는 저열한 성격의 소유자로, 플랫을 업신여기면서도 시기하여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어느 날, 참지 못한 플랫이 그에게 대들고 급기야 몸싸움을 벌이자, 그는 친구들을 불러와 나무에 밧줄로 플랫의 목을 맨다. 근처에 있던 농장 관리인에 의해 저지되어 죽음으로 가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지만, 포박당한 채 목매달아진 플랫은 발끝으로 진흙 바닥을 버티며 해가 저물 때까지 그 상태로 있어야 했다. 이 씬은 러닝타임으로 보자면 5분도 채 되지 않으나 플랫이 진흙바닥 위에서 발가락 끝을 끊임없이 옮겨 짚는 사운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 매달린 플랫을 뒤로하고 일상생활을 하며 돌아다니는 흑인 노예들의 모습, 그중에서도 플랫을 전경으로 흑인 노예의 아이들이 노는 풍경, 내리쬐는 태양 아래 플랫의 얼굴 위로 내린 하얀 소금기 같은 것들은 스크린 밖의 짧은 시간을 정말로 한나절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또 다른 장면은, 주인으로부터 노동은 물론 성적인 착취까지 받고 있는 흑인 여성 노예 팻시가 채찍질을 당하는 씬이다. 팻시에 대한 욕정과 집착에 휩싸여 있는 주인 에드윈 앱스는 비누를 얻으러 옆 농장에 다녀온 팻시가 흑인을 아내로 두고 있는 옆 농장 주인과 관계를 맺었을 거라는 의심으로 그녀의 옷을 다 벗긴 다음 플랫에게 채찍질을 하라고 강요한다. 플랫의 채찍질이 마음에 들지 않은 앱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채찍을 휘두르고, 매끈했던 그녀의 등은 비명소리와 함께 한 줄 한 줄 터져나간다. 마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의 한 장면과 같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지속되다가 더 이상 팻시의 비명이 들려오지 않을 즈음 앱스의 채찍질이 멈춘다. 한껏 상기된 그의 표정에는 오르가즘에 이른 것 같은 절정이 스친다.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와 뛰어난 화면 구성, 일화의 구체성 등은 이 두 장면이 감독에 의해 허구적으로 삽입된 장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일화들은 솔로몬 노섭의 수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사실을 충실히 반영하여 연출된 것이었다. 첫 영화 <헝거>(2007)에서부터 스티브 맥퀸 감독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가 미디어 아티스트다운 감각적인 미장센과 카메라워킹이었던 것을 상기해 보면, <노예 12년>의 경우 화려한 화면 연출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짐작컨대 이는 솔로몬 노섭이라는 실재 인물의 삶과 그가 남긴 수기를 가능한 한 꾸밈없이 그대로 영화화하고자 한 스티브 맥퀸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헝거>역시 IRA 소속 보비 샌즈의 실제 옥중 투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긴 했다). 더불어 스티브 맥퀸 역시 흑인이고, 그러한 만큼 이 영화를 만든 그의 마음 역시 남달랐으리라. 
앞서 언급한 두 장면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지켜보기 고통스럽다. 물론 영화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닌, 플랫을 비롯한 미국 흑인 노예들의 삶을 보고 견디는 것이 힘들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다시 보고 싶은, 아니 듣고 싶은 장면이 있다. 목화를 수확하다 쓰러져 죽은 엉클 에이브럼을 묻고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는, 흑인 노예들의 비애가 묻어나는 장면이다. 악기 하나 없이 그들의 손박자와 합창으로만 구성된 <Roll Jordan Roll>은 다른 영화들에서 들었던 그 어떤 음악보다 큰 울림을 주며 흑인 노예들의 애환을 느끼게 했다. 이런 관객들의 마음을 미리 간파했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극장에는 다시 한 번 <Roll Jordan Roll>이 울려 퍼진다. 관객들은 어느 영화보다 고된 2시간 14분을 견뎠을 것임에도 끝까지 좌석을 지키고 있었다.      

더 보기 : 한 방울의 검은 피

  아메리카 대륙의 개발시기가 노예 역사의 시작점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아메리카-유럽-비서구권의 노예무역은 분명 노예화된 인구수의 폭발적인 증가를 보여준다.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은 삼각무역이었다. 유럽에서 출발한 배에 선적된 제품들은 아프리카에서 인신매매 당한 사람들과 교환됐고, 이렇게 교환된 사람들은 배에 실려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졌다. 대서양을 건너는 여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노예로 팔렸으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노예를 싣고 온 배들은 가공되지 않은 제품들, 이를테면 담배나 설탕, 솜, 럼주 등을 싣고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지막까지 노예제도를 유지했던 브라질이 1888년에 폐지하기까지 지속됐다. 이 시기에만 2천800만 명 정도가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 이주됐으며, 같은 시기에 유사한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양 주변에서도 행해졌다. 
  노예 제도는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64년 뉴욕(당시 뉴암스테르담)에서는 노예가 된 아프리카 인들이 인구의 1/5을 차지했고, 1775년 미국 독립혁명 당시에는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뉴저지, 뉴욕에만 거의 4만 명에 육박하는 노예들이 있었다. 대규모의 농장과 다이아몬드, 면 산업의 성장과 더불어 1860년 노예의 숫자는 4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1865년 이후 미국에서 13차 헌법 개정에 따라 노예의 법적 소유권이 사라졌지만, 말 그대로 법적 소유권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백인들은 노예를 소유하지 않고도 지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이후 흑인 노예는 ‘노예’라는 이름을 벗었으나 노역꾼(peonage)라는 법망을 피한 새로운 이름으로 빚에 의해 예속되어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 예속의 사회적 기억은 아직까지 미국 흑인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