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후죽순 / 이공계 대학원생

 
 
  대학은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을 위한 교육 및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교육주체는 학부생, 연구주체는 교수, 기관의 행정적 운영주체는 교직원, 그리고 그 사이에 ‘학문 후속세대’라 불리는 대학원생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연구실에서도, 수업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보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다. 학생사회, 교수사회, 직원사회도 있지만 원생사회는 단어의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원생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상식 이하의 부당한 대우가 곪을 대로 곪아 터져 나왔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존재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발적 충성경쟁 레이스

  대학원은 단순히 공부와 연구만 하는 곳은 아니다. 과정을 다 마치면, 연구원이 될 수도 있고 강사가 될 수도, 운이 좋으면 교수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대학원이 단순히 이를 준비하기 위해 단계를 밟는 곳은 아니지만, 대학원에 간다는 것은 학계에서 일한다, 혹은 앞으로 일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계는 좁고, 그래서 자리도 적다. 그런데 사람은 많다. 그리고 교수는 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 사례 1. 지난해 12월 말 서울대 대학원생 이승민 씨(28·가명)는 교내 우체국에 갔다. 지도교수가 지인들에게 연말선물 40여 개를 보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씨 외에도 같은 이유로 온 열댓 명의 대학원생으로 우체국이 북적였다. 3시간이 지나서야 이 씨는 우체국 업무를 마쳤다. 이 씨는 오후에 유치원에 들렀다. 지도교수의 아이를 집이나 학원에 데려다주기 위해서다. 이 씨는 “내 처지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교수의 아이마저도 밉게 보인다”고 말했다. 이 씨는 지도교수의 집 비밀번호와 은행 계좌번호도 외우고 다닌다. 세탁소에 교수의 옷을 맡기고 찾는 건 그나마 간단한 일이다. 종종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가기도 하고, 연구실의 화초를 돌보는 것은 기본이다.

  ■ 사례 2. 연세대 이공계열 대학원생 박민준 씨(29·가명)는 “대학원생들이 교수의 개인 여행일정을 짜고 숙소 잡는 일도 한다”면서 “이전에 어떤 교수는 자기 옆집 개가 짖어서 시끄러우니 대학원생한테 옆집에 소송 걸라고 해서 법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 사례 3. 고려대 대학원생 김시영 씨(32·가명)는 “학생한테 논문을 대신 쓰도록 하는 교수도 많다” 전하며, “학생들 사이에 제대로 대학원 다니고 싶으면 외국 나가라는 우스갯소리가 오간다”고 말했다.

  ■ 사례 4. 본교 이공계열 대학원을 졸업한 김민성 씨(27·가명)는 “하루 15시간씩 일하면서도 개인 비서처럼 교수가 시키는 건 다 했다. 눈 밖에 났다가 학위를 받지 못할까봐 참았다”고 말했다.

  알음알음 모아낸 사례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잘 보이기 경쟁’이다. “어디에 무슨 자리가 났는데 성적이 한참 떨어지는 사람이 됐다더라. 걔가 좀 교수한테 잘 보였잖아. 그 선배 임용 안 됐더라, 왜 저번 행사에 오지 않았었잖아.” 소문처럼 떠도는, 교수에게 잘 보이기 위한 여러 행동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유치했지만 ‘잘 보이기’에 실패한 이들에게 닥치는 여러 일들은 전혀 유치하지 않았다. 휴일이라도 교수님이 참가하시는 행사에는 당연히 참가해 잘 보이는 곳에 앉아야 하고 우편물 부치기, 세탁물 맡기기부터 교수 자녀의 과제 대신하기, 교수가 자신의 이웃집 소음에 대한 이야기 들은 원생이 자발적으로 소송을 걸기 위해 법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충성경쟁 레이스에 제 발로 뛰어들어야 했다.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하는 이들이,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이를 배척해 끝내는 대학원을 그만두게 만들었다는 사례는 거짓이었으면 했다. 수업 시간 학부생들에게 항상 존댓말을 사용하며 인자하게 웃던 교수님들은 대학원생들에게는 ‘벽옥 같은 사랑의 하느님인 동시에 홍보석 같은 진노의 하느님’이 되기도 했다.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직장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느냐만, 교수와 대학원생은 상사와 부하직원이 아닌 사제관계이기에 문제가 된다. 불합리에 시달리지 않는 대학원생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 교수님은 좋은 분이셔서 다행이야” 소극적인 준법자가 모범시민으로 비치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분명한 불합리가 대학원 사회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무서워서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일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충성을 보이기 위해서 시키지 않는 일까지 미리 하는 사람이든, 일부의 착취를 자행하는 교수든, 바깥에서 보는 학부생이든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원생 사이에서는 이미 떠돌고 있는 문제지만 이를 공론화하는 순간, ‘잘 보이기 경쟁’ 레이스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을 넘어 모든 것에서부터 소외된다. 장학금과 조교 배정, 학위 수료는 모두 교수가 결정한다. 교수는 갑이다. 그리고 대학원생은 을, 아니 병 즈음 된다. 을 혹은 병은 억울해도 참아야 한다. 이 가운데 부조리는 싹을 틔우고 점점 커진다. 간혹 교수 연구비 배임 사건이 기사화되곤 했지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연구 인건비 유용에 대한 이야기는 인터넷에서나, 그것도 익명으로 밖에 찾아볼 수 없다. 자료조사를 돕는 것을 넘어 대필 수준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는 하소연도 있다. 징계가 분명한 사례들이 쌓이고 또 쌓이는데, 아무도 징계를 받지 않는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까, 아니 말할 수 없으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된다.

  물론 ‘불안’이 시대정신인 사회에 그 누가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누가 더 불행하냐며 불행을 경쟁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조금 불행하니까 더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면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옆에서 ‘토닥토닥,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것, 소위 말하는 멘토들의 ‘힐링’에도 한계가 있다. 국면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불행을 ‘힘들어요, 아파요’ 이상의 의미로 파악하는 작업이다. 개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 더해 그 고통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이해로부터 돌파구가 나올 수 있다.

  대학원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30분, 아니 1시간이라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다. 굳이 이 문제에 천착해 고민해온 사람이 아니라 아마 길 가는 대학원생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줄줄 나오리라 생각한다. 언론보도 등을 통해 대학원생들이 왜 고통받는지, 그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우리 사회에 공유돼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금 대학원생들의 처지에 대한 논의가 보편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노동시간, 노동환경, 임금, 건강, 존엄성 등이 한정적으로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인권의 문제는 중요하며 우선적으로 해결돼야 한다. 하지만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보편적 인권 보장과 다른 층위에서, 즉 한 사람이 그냥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가지는 특수한 의미이다. 대학원생들의 열악한 처지와 그로부터 기인하는 열패감, 그리고 대학원생에 대한 인식은 이 사회에서 ‘지식인’이 가지는 위상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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