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혜 / 한예종 영상이론학과 석사

그녀들의 마음은 지지 않는다

  지난달 26일은 제1115차 수요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위안부는 민간에서 행한 일이었다”라는 일본 측 발언에 반기를 들고 증언을 결심한 故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증언했다. 같은 해 말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창립되었고,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수요시위가 시작됐다. 한국 사회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길고 지속적인 투쟁은 50여 년의 세월을 침묵 속에서 홀로 견뎌내야 했던 그녀들의 한이 자아내는 힘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상매체 중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사회현안을 포착해내는 것은 독립 다큐멘터리이다. 1995년 1부를 시작으로 1999년 3부까지 제작되어 ‘나눔의 집’에 머무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과 삶을 소재로 한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시리즈에서부터 재일조선인 송신도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진행한 10년을 기록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 심달연 할머니의 삶을 <꽃할머니>라는 제목의 그림책으로 만든 권윤덕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그리고 싶은 것>(2013) 까지 꾸준하게 작품들이 생산되고 있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와 <그리고 싶은 것>이 한 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조명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낮은 목소리>시리즈의 경우, 제작자가 오랜 기간 지속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여러 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증언과 삶을 보여준다.
  일본군 ‘위안부’의 영어 명칭은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으로, 직역하면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이다. ‘성노예’라는 말이 가진 강한 어감, ‘위안부’라는 용어가 일찍부터 공식문서에 사용되었다는 점 등의 이유로 현재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지만 그녀들이 견뎌내야 했던 삶은 문자 그대로, 일본군의 소유물이 되어 집단 성폭행을 당한 성노예의 삶이었다. 일본 패망 이후에도 끌려갔던 곳인 중국 무한에서 여생을 살아온 하군자 할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나이 많은 남자와 잤다. 아파서 오줌도 누지 못했다”고 소녀처럼 엉엉 울며 말했다(<낮은 목소리1>). 대만에 있던 위안소로 끌려갔던 김분선 할머니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하루 저물도록” 군인을 받았다며 8년을 그렇게 보냈으면서도 살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했고, 나물 뜯다 끌려간 심달연 할머니는 위안소 생활로 인해 실성을 한 채 몇 년을 보냈다(<낮은 목소리3>). 송신도 할머니의 경우에는 콘돔을 손에 끼고 배 속에서 죽은 아이를 스스로 빼내야 했던 끔찍한 기억을 꺼내놓았다(<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없었으며, 보상이 있었던 몇몇 경우마저도 해방 이후엔 사라졌다. 오히려 심각한 수준의 몸과 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은 피해자들을 매독, 임질 같은 성병과 자궁 및 장기 훼손으로 이끌었고 정신 건강 역시 피폐하게 만들었다. 많은 피해자들이 ‘위안부’ 경험 이후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는 이후 이들이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박탈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책임을 묻는다>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성적인 착취와 폭력 외에도 전쟁 나가는 군인의 배웅과 환송, 신사참배, 간호 등의 일을 통한 노동 착취까지 당하며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관통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정서에서 부각되는 것 중 하나는 ‘창피함’ 혹은 ‘부끄러움’이다. 이는 변영주 감독이 김윤심 할머니에게 “부끄러움, 자책이 많으시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 이겨내기 힘드신 건가요?”(<낮은 목소리3>) 라고 질문한 내용에서 드러나듯 본인 스스로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약 20만 명의 일본군 ‘위안부’ 중 1/3 이상을 차지할 거라 추측되는 조선의 여성들은 질병, 자살 등의 이유로 죽거나 현지에 남았으며, 돌아온 경우에도 자신이 겪은 일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하루 20, 30명의 일본인 군인들을 상대했다는 사실은 “어머니한테도 말 못할”(<낮은 목소리1> 박옥련) 일이었고, 말 한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거나(<낮은 목소리2> 김복동) 돌아오는 답변은 “그럼 뭣 하러 살아왔냐. 죽어버리지”(<낮은 목소리3> 김윤심)라는 통곡이었다. 이는 당시 지배적인 가부장제하에서 강하게 발휘된 현모양처, 순결이데올로기의 작동 결과로, 피해들은 자의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스스로를 책망하며 남은 평생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관통하는 할머니들의 또 다른 정서가 존재한다. 이는 할머니들의 아직 청산되지 못한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의지와, 삶 그 자체에 대한 의지이다. <낮은 목소리2>에는 물놀이를 간 할머니들의 모습, 콩 타작 같은 가을걷이를 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머리에 호박을 이고 가는 할머니들과 감독이 주고받는 대화는 <낮은 목소리> 시리즈에서 단연 큰 울림을 주는 장면이다. 일 하는 장면들을 왜 찍으라고 하셨냐는 변영주 감독의 질문에 김순덕 할머니는 “나쁘지 않게, 참다운 생활을 했다”(<낮은 목소리2>)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라고 답한다. <낮은 목소리2>가 <낮은 목소리1>과 달리 할머니들의 의지에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장면들 역시 할머니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는 사실은 할머니들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땀 흘려 노동을 하며 ‘참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점은 할머니들에게 한 많은 역사와는 또 다른 생에의 의지가 있음을 말해준다. <낮은 목소리3>에 등장하는 이용수 할머니는 1998년 피스보트 아시안 크루즈를 통해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을 방문하여 연대를 다지고, 직접 인터뷰이로 나서서 서봉임, 심달연, 강묘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강묘란 할머니와의 인터뷰에서 “형제간도 이런 형제간이 없다”며 눈물을 흘리는 이용수 할머니의 모습은 같은 ‘위안부’ 피해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공감과 자매애를 느끼게 해준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송신도 할머니의 경우 비록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10년이라는 긴 재판에서 졌지만, 그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넘어 반전운동가가 되어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계셨다. 1991년 이후 증언을 하신 할머니들의 삶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를 견뎌야 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과 자책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이 당한 고통을 역사화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더 보기: 안세홍이 만난 중국에 남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

 

 
 

“도망치고 싶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디메로 도망을 쳐요. 잡히면 죽어요.”
얼마 전 김순옥 할머니(1922~)는 남편의 생일날을 맞아 무단장에 사는 큰딸한테서 핑크빛 갑사로 만든 한복 한 벌을 선물받았다.
“내래 죽기 전에 한복 입고 사진 박히는 게 소원인데, 한 장 박아주소.”

  중국에 남아있는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을 오랜 시간 지켜보고 사진을 찍어온 안세홍 작가의 사진집 <겹겹>(2013)의 한 장면이다.
  우리들의 할머니들에게 노예라는 이름은 그리 먼 이름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 군대는 필리핀, 한국, 타이, 베트남, 중국 등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노예화했으며, 여성과 아이들을 병사들이 이용하는 매춘부가 되도록 강요했다. 국가가 운영하는 거대한 사창가인 ‘공중화장실(comfort stations)’이 일본 군대가 점령한 모든 국가에 세워졌으며, 약 20만 명의 여성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노예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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