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이 대표발의한 중독법으로 인해 게임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게임 때문에 폭력적으로 변해 총질을 한다거나 비만에 걸린다거나 히키코모리가 된다는 언론과 정부의 주장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필자는 실제로 게임 중독이 심각한 해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런 소모적인 논쟁은 하고 싶지 않다. 대신 비디오 게임도 예술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지난해 사망한 로저 이버트는 <비디오 게임은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글을 게재했다. 하나하나 반박해 보자. 로저 이버트는 게임과 예술의 명확한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승리라는 개념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영화, 미술, 연극은 체험할 수는 있지만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승리’의 개념이 없는 게임들과, 오로지 체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임이 얼마나 많은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만한 판단이다. 그는 예술이 단순히 청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의사소통 방식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시집이나 성경에 말을 덧대고 글을 적는 일은 독자 스스로 예술을 창조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비디오 게임을 단순히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코나미에서 나온 <삼국지>게임을 하면서 게임일지를 기록하고, 자신만의 삼국지를 써보고 창작해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예술을 창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버트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의 스틸 컷을 보고 비디오 게임의 화면보다 제한적인 기술력을 가졌겠지만 더 뛰어난 예술성과 상상력을 가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예술이 가상의 구제라는 측면을 갖는다면 게임은 이에 매우 적합한 매체이다. 만약 비디오 게임이 포르노처럼 세속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선정적인 시청각 자료로서의 기능과 상업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존재한다면? 그러나 질문을 반대 방향으로 틀어보자.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이나 툴루즈 로트렉의 물랭 루주 연작은 상업적인 목적을 얼마나 벗어나 있었던가?
  그는 게임 제작자들이나 게이머들은 게임이 예술로서 인정받아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게임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예술로 승격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냐고. 글쎄, 필자는 부끄럽지 않다. 필자는 중독자다. 나는 게임에서 예술을 배웠고 예술에 중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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