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 /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산책도 못하게 하고 병원 건물 밖을 못 나가게 한다.” 

  듣기만 해도 ‘시설’임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그런데 이같은 간병인의 증언은 전형적인 시설이 아닌 시설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요양병원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11월 5일 있었던 중증/정신질환 에이즈환자 장기요양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된 수동연세요양병원에서 환자방치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물론 장기요양이 필요한 중증/정신질환 HIV감염인들은 정기적인 진료와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요양병원조차 없다. 이는 HIV감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 때문이다. 위 병원은 질병관리본부의 위탁으로 2009년 12월부터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 시범사업 수행기관’으로 지정됐지만, 병원 측에서는 HIV감염인의 입원 사실을 쉬쉬할 뿐 아니라 차별과 가혹행위가 빈번했다. 이는 너무나 전형적인 ‘배제와 폭력의 공간’인 시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요양병원의 문제라 하면 소위 남의 문제처럼 다가오진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나이 들어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면 요양병원(노인시설)에 가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테니 말이다. 이제 시설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무언가를 기준으로 사회구성원들을 배제하고 격리함으로써 유지되는 시설사회에서 필연적인 선택지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설은 관료적 국가가 선택하는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애인, 부랑인, 노인들이 시설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인간적 권리는 삭제 당한다. 시설에 있기 위해서 또는 시설에 있는 한 그곳의 작동원리와 명령체계에 따를 수밖에 없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했듯 규율은 개인을 제조하고, 개인을 권력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기술이다. 그리고 시설은 사람들을 나누고 배제함으로써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통치성의 원리를 시설 밖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시설은 그렇게 시설생활인(수용인)과 시설 밖 사람들을 훈육한다. 사람들은 추방되지 않기 위해서 더욱더 사회가 정한 규율, 정상성에 기대야 하고 이를 내면화한다. 또 스스로 자기 몸을 가꾸고 정신을 훈련시킨다. 그 결과 국가권력만이 아닌 사회구성원들 스스로 차별과 낙인을 확대하게 된다.


시설 사회에 균열 내기


  이러한 시설사회에 틈을 만드는 일은 시설을 바꾸고 없애는 일만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정상성과 규율을 거부하는 일이 아닐까. 즉 시설 외의 다른 대안을 만들고 곳곳에 ‘사회적인 것’을 만드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설이 아닌 대안의 장소로 모이거나 그런 장소를 만든 경험은 소중하다. 물론 그렇게 모이게 된 것은 처음부터 의도했다기보다 우연한 것이 반복되면서 장소성을 획득하게 되고 사람들은 그곳에 애착을 갖고 장소성을 강화시켜왔다.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마포도 그 한 예다. 예전부터 마포에는 성미산마을학교나 민중의 집 같은 주민공동체나 주민들 간의 네크워크가 있었는데,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동네를 해체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성미산 지키기 싸움과 2009년 12월부터 시작된 두리반 싸움이 대표적이다. 이때도 지역단체들이 함께 했다. 몇몇 언론에 보도되었듯 마포에는 여러 인권시민단체들이 모여 있다. 필자가 속해있는 인권운동사랑방 뿐만 아니라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언니네트워크, 인권중심 사람, 동성애자인권연대, 여성민우회, 문화연대, 민중의 집 등.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단체들이 있었지만 같은 목표를 갖고 모인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시내로부터 밀려 나오다보니 이곳으로 오게됐고 인권운동사랑방도 월세가 시내보다 싼 곳을 찾다보니 온 곳이 마포였다. 그러는 중에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 만들어졌다.

  인권단체들이 조금씩 오기 전부터 마포에서는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 관계가 우발적인 사건이 반복되면서 장소성과 사건의 힘을 강화시켜주었다. 계기는 마포구청이다. 마포구청은 작년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 ‘LGBT, 우리가 여기 살고 있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자 주민들에게 혐오를 준다며 게시를 거부했고, 마포지역 주민들과 성소수자단체들은 이러한 성소수자 차별에 대항해 싸웠다. 이 사건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진정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지만, 마포구청은 최근에도 퀴어문화축제로 인해 주민민원이 많았다는 이유로 언니네트워크의 ‘커밍아웃 문화제’를 위한 홍대 앞 나무무대 사용신청을 거부했다. 이에 맞서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를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권력이 말한 주민화합과 갈등이 무엇인지 물으며 항의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주민은 누구인가? 결국 그들이 구획해놓은 주민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는 행위는 단순히 신체의 감금인 시설이 아니라, 권력의 규율대로 개개인의 삶과 정체성을 숨기고 살 것을 명하는 시설사회의 단면을 폭로하며 균열을 내는 것이다. 즉 마포구청의 “마포에는 성소수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니 존재하더라도 “숨어 있어”라는 구청권력의 규율에 항의하고 싸우며 마포는 주체의 장소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저항과 연대의 장소, 대한문


  이렇듯  권력의 규율에 맞선 대안의 장소는 비단 마포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저항의 장소로 부각된 ‘대한문’이 있다. 정리해고된 쌍용차노동자들의 죽음이 줄을 잇던 지난해 4월, 22번째 희생자가 생기자 더 이상 죽음을 방치해선 안 되고 사회가 함께 해결할 문제라며 대한문에 분향소를 차리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쌍용차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정리해고가 낳은 인권박탈의 현실을 드러냈고, 그러다 쌍용차노동자들도 참여한 전국의 투쟁현장을 순회한 ‘생명평화대행진’을 한 후 ‘함께 살자 농성촌’을 만들었다. 생명평화대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강정해군기지 반대운동, 용산철거민 사망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밀양을 비롯한 탈핵운동 단위였다. 농성촌을 만든 것은 ‘함께 살자’는 가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대한문은 연대의 장소로 거듭났다.

  더구나 새정부가 들어선 이후 중구청이 대한문 분향소를 여러 차례 철거하려 했음에도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분향소의 상징성을 지키기 위해 함께 싸웠고, 그렇게 대한문은 저항의 장소가 됐다. 얼마전 쌍용차노동자 분향소는 평택으로 옮겨갔지만 쌍용차노동자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주체들이  밀양주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장소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대한문에서 ‘철거민’도 만나고, ‘성소수자’나  ‘HIV/AIDS 감염인’도 만난다. 거기에는 밀양 할매도 있고, 장애인, 노숙인, 알바 노동자도 있다. 자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대한문에 당도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대체 추방된 그 기준은 무엇이고,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게 맞는 것일까?’라며 의문을 품게 된다. 이렇게 사람들은 타자들과 마주치면서 권력이 쳐놓은 정상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즉 사람들이 연대·투쟁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대한문은 저항의 장소이자 타자-되기의 새로운 주체성을 경험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반면 국가권력과 자본은 기를 쓰고 이러한 장소를 없애기 위해 모든 자원(집시법, 경범죄처벌법, 업무방해죄 등의 모든 법적 수단과 경찰과 용역까지)을 동원하고 있다. 박근혜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대한문 분향소, 골든브릿지 파업농성장 등 여러 농성장들이 철거되고 있다. 그럼에도 주체들은 이에 멈추지 않고 균열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달 전국 각지에서 밀양으로 가는 희망버스가 말해주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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