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엄지 / 소설가


  그는 산책을 나가기 위해 셔츠를 입었다. 셔츠 위에 카디건을 입고, 카디건 위에 파카를 입었다. 검정바지 입은 뒤에 검정 양말을 신었다. 그리고 비닐우산과 지갑을 챙겨 집밖으로 나섰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는 호숫가를 향해 걸었다. 그의 집에서 호수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팔랐다. 호숫가로 향하는 좁고 가파른 그 길에서 그는 우연히 흰색 종이를 발견했다. 그보다 먼저 호수로 향하던 사람이 흘린 것이었다. 그가 종이를 주워 곧장 달려갔다면, 종이의 주인을 만났을 수도 있었다. 종이는 깨끗했다. 두 번 접혀져 있었고, 스프링노트에서 뜯겨진 것이었다. 

  얼마 후에 너를 다시 만났을 때, 너는 몹시 지쳐보였다. 그도 그랬을 법한 것이 그때 시각이 새벽 두시가 다 되어갔으니까. 너는 나를 보고 실망했는지 내게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었지. 나도 그런 네 모습에 적지 않게 실망하고 낙심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너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지쳤다. 이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비단 너에 대한 기대만을 접는 것이 아니다. 하나 부질없는 인간관계와 유지하기에 급급한 세금고지서들에 대해서, 모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방적인 통보들, 그런 것들에 더 이상 슬퍼하고 싶지 않다. 얽매이고 싶지 않다. 나를 그동안 살게 한 것은 오로지 자괴감이었던 것 같다. 이제 그조차 없다. 지금 나는 후회하지 않고 자괴심을 느끼지도 않는다. 오늘의 이런 선택이 있기까지는 너에게 다 말하지 못한 몇 가지 시련이 있었다. 악몽이 반복되어서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다. 늘 피곤하다. 이제 그만 피곤하고 싶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어릴 적에 나는 요트를 한 대 사고 싶었다. 나 혼자 바다 가운데 있고 싶었다. 이제 나는 깨달았다. 요트는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장미를 키우고 싶었다. 장미들을 꺾어다가 집 안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런 꿈들이 있었다. 너는 내 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놀랄 수도 있겠지. 요트나 장미에 대해서 좀 더 길게 너와 이야기 나눴더라면 나는 아마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많다. 알아도, 몰라도, 변하는 건 없다. 이제 나는 포기한다. 나를 끝으로 몰아가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는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너를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유독 너를 지목하여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마음 쓰인다. 부디 빠른 시간 안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주길 바란다. 이상한 날들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그는 거기까지 읽은 뒤에 종이를 다시 접었다. 그는 요트와 장미에 대해서 상상했다. 편지 형식의 유서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자가 쓴 글일까 남자가 쓴 글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종이의 주인이 수신자였을지, 발신자였을지, 잠깐 동안 궁금했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비는 언제 그칠까. 그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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