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슬 / 음악 비평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음악의 어원인 무지케(mousike)는 뮤즈가 관장하는 연극, 시, 노래, 무용 등을 말하는 것이며 뮤즈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와 제우스를 부모로 둔 아홉 자매들의 이름이고, 므네모시네는 시간의 신이었던 크로노스와 남매지간이었다고 한다. 꼭 이 어원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음악이 시간과 기억에 묶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음악은 기억의 딸이고, 시간의 조카 쯤 되는 것이다.

  나는 주로 20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 글을 쓴다. 연주가 아니라 작품 자체를 평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쓰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작품을 들으면 이게 훌륭한 건지 아닌지, 감상자에게 장난을 치는지 아닌지, 엄청난 발명인지 혹은 발견인지, 이런 가치판단을 즉각적으로 하게 되지만, 곧 나를 의심하게 된다. 좋다 나쁘다 이렇다 저렇다를 평가하기 이전에 내가 이 작품을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13년씩이나 된 지금 그 어떤 소리에 대해 음악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답도 없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작품을 판독하는 일은 이미 안중에 사라지고 음악의 마지노선을 찾게 된다. 명쾌한 답을 내리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럴 때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수많은 의심과 의혹들을 없애기 위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음악을 듣기로 마음먹는다. 글쓰기를 위해 머리를 굴리며 듣고 있던 음악을 멈추고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92)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Quatuor pour la fin du temps, 1940-41), 그 중에서도 5악장을 듣는다.

  이전과 다른 음악, 이전에 없었던 작품을 만드는 데 주력했던 메시앙은 2차 대전 중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어 그곳에서 이 곡을 작곡했다. 음악적 실험에 골몰했던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작곡한 곡은 분명 이전 작품들과 다른 것들을 담고 있다(물론 이 곡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다). 시간 자체에 대한 질문이든, 시간을 분할하는 리듬이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메시앙은 시간에 대해 깊게 생각하던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의 음악은 시간의 분할과 조합에 의한 것이라기 보단 매순간 터지는 음색의 불꽃놀이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의 5악장은 계속 이어지는 선율과 불협화음, 제자리를 맴도는 화성, 갈등도 해결도 클라이막스도 없는 진행으로 흘러간다. 완급조절 없이 계속해서 시간을 가득 채우는 소리들은 앞의 소리를 기억하며 작품의 구조를 짜 맞추고, ‘통일된 한 작품’이라는 도식을 완성하는 과정을 허물어뜨린다. 음악 외의 목적―명예, 돈, 신앙고백, 감정자극, 실험 등―은 여기 없다. 중요한 음, 중요하지 않은 음의 구분도 없다. 목적은 소리로 이 시간을 관통하는 것.

  그러고 나면 나는 메시앙의 작품을 들은 게 아니라 음악을 들었다고, 작품이 끝난 게 아니라 이 시간이 끝나버렸다고 느낀다.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는 시간과 음악의 마지막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은 다시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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