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게임중독법(‘중독 예방·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법안을 발의한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은 “게임 규제나 금지가 아닌 구제 차원의 기본법”이라면서 술, 마약, 도박과 함께 게임을 중독이라는 병리적 층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물론 이러한 게임 관련 규제성 정책들이 증가하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외려 우리가 놀라야만 하는 건 이만큼이나 진지한 법안 만들기가 아닌, 언제나 ‘별일 없는’ 상태로 우리의 눈 속을 정주하는 모니터 화면들일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국내 온라인 게임 산업의 부흥기를 살아낸 필자에게 게임은 일종의 ‘자기만의 방’이었다. 물론 버지니아 울프가 듣는다면 꽤 섭섭하겠지만, 그 방에선 문학·예술의 창조와 관련된 실천보다는 끊임없는 파괴의 쾌감이나 마술적인 세계관을 통한 상상계의 확장이 펼쳐졌다. 그렇게 PC통신보다는 마우스질에 익숙해질 무렵 인터넷이 보편화됐고, 이제 게임은 홀로 끝판대장을 물리치는 게 아닌 ‘파티’를 통한 협업의 전략을 필요로 하는 것이 됐다. 파괴의 작업은 이제 물리쳐야 할 대타자뿐만이 아닌 실제의 타자들 또한 요구했고, 상상적 세계들은 현실만큼이나 잔혹한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모순을 닮아가고 있다.

  이렇게 게임 산업이 패키지 시장에서 온라인 시장으로 변모한 것은 어쩌면 광랜의 보급이라는 물리적 조건에 후행하는 것 같지만, 중독이라는 사회병리적 낙인과 맞닥뜨리게 된 건 확실히 그 이전부터였다. 게임이 가진 중독성과 폐해에 관한 논의들이 쏟아진 90년대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청소년들은 ‘게임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슬로건을 무의식 깊숙이 새겨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로게이머’의 탄생으로 이러한 억압적 기제들이 한풀 꺾이는 듯했지만, 정작 게임이라는 무형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은 신자유주의의 발흥과 함께 더욱 과잉된 그 무엇이 됐다. 이제 청소년들은 사회·국가적 보호라는 억압을 통해 게임이라는 향락의 대상을 분리시키는 데 능숙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술, 마약, 도박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현실도피나 그 자체의 괴로움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 타자성을 긍정하는 것이듯, 게임의 소재와 형태가 중독이라는 정신교란을 형성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사회가 은폐하는 게임의 논리, 즉 실재의 잔혹함에 대한 자기부정의 제스처가 그러한 몰입과 지속성을 생성해내는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사회의 모든 언어게임의 서막 또한 이러한 자기부정에서 열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개인’이라는 필요조건 속에서 중층결정될 때, 비로소 게임이 부여하는 세계 속의 개체가 아닌 ‘익명으로서의 개인’이 탄생한다. 어쩌면 우리가 이러한 (언어)게임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그 세계관과 내러티브에 매료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익명의 자신을 응시하는 달콤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원의 댓글놀이나 수많은 악플들, 유령처럼 번지는 종북 프레임 텍스트, NSA의 통신감청 등은 여전히 그 달콤한 언어게임의 장을 증폭시킨다. 익명의 개인들은 결코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지만, 라운드는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언어게임을 벗어나는 것, 혹은 내부로부터 그것을 찢고 나오는 건 그러한 게임의 논리, 룰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숨겨진 비밀을 폭로하는 스노든일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게임의 룰 자체를 폭로하는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마르크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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