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광 / 고려대 휴먼웨어 정보기술사업단 연구교수

 
 

  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연구의 지형도는 크게 바뀌었다. 수많은 과학자들을 동원해서 비밀리에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비롯, 전쟁 기간 동안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과학 연구 프로그램들이 속속 진행 되면서 과학 연구의 주도권이 과학자 개인에서 국가와 같은 거대 조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간을 달에 보낸 아폴로 계획이나 사람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해독한 인간게놈프로젝트처럼 천문학적 비용과 첨단 장비가 사용되는 국가 주도의 연구관행이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연구 주도권은 연구자 개인에서 정부나 초국적 기업과 같은 거대 조직으로 넘어갔고, 과학 연구가 관료화 및 정치화되는 등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과학 연구가 개인의 호기심이나 창의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를 주는 정부나 자본의 특정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편향됐던 것이다.

  몇 해 전 우리나라의 경우, 만들지도 못한 배아줄기세포가 있다고 속여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킨 황우석 박사의 연구부정행위는 과학의 국가주의가 어떤 폐해를 낳을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조작이 밝혀지기 전까지 황우석 박사는 정부와 과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영웅시되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의혹을 제기했던 MBC 피디수첩이나 시민단체들은 여론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황박사 연구팀의 지나친 애국주의 마케팅이나 여성들의 난자 수급 과정의 윤리적 문제를 지적한 사람들에게 ‘매국노’라는 꼬리표가 붙곤 했다. 물론 연구결과를 조작한 황우석 박사에게 일차적인 잘못이 있었지만 이 사건이 국가적 사태로 번지게 된 데에는 정부와 과학계, 그리고 언론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배아줄기세포에 천문학적 연구비를 쏟으면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식의 성과주의에 빠져 있었다. 과학계는 오랜만에 나타난 스타 과학자로 높아진 대중적 관심에 취했고, 언론은 특종 제조기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황우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졌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는 우리 사회가 과학을 국가와 너무 쉽게 등치시키는 경향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국가주의의 경향이 강해진 데에는 과학을 수용할 당시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과학에게도 암흑기였다. 일제는 수탈을 위해 약간의 기술자들을 양성했을 뿐이고, 본격적인 과학 연구는 해방 이후에야 시작됐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싹틔우던 과학은 몇 해 후 벌어진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졌고 일반 대중들은 미군의 막강한 군사기술과 페니실린과 같은 약품의 효능으로 과학을 처음 접했다. 또한 전후 경제개발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과학입국’과 ‘전국민 과학화’를 주장하면서 경제발전을 위해 대대적으로 과학을 동원했다. 이후 많은 정권이 교체됐지만 ‘과학=국가’라는 등식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현대사의 아픈 굴곡이 과학의 국가주의로 우리들의 인식에 고스란히 배어든 셈이다.

  그렇다면 왜 국가주의가 문제인가? 과학이 곧 국가의 일이라는 생각은 과학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나 가치부여를 가로막을 수 있다. 지금까지 과학에 대한 관점은 과학을 발전시켜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육성주의로 일관했다. 이러한 접근은 어떻게 과학을 연구하는 것이 옳은가의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고 과연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라는 성찰적 물음이 제기될 수 있는 여지를 없앤다. 몇 해 전, 한 방송국의 설문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황우석의 연구 재개를 주장했고, 그 주장의 근거를 묻자 윤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쟁력을 위해 필요하다는 답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과학을 경제발전과 국가 경쟁력 재고의 도구로 보는 관점이 팽배해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우리 사회에도 그동안 선진국들을 추격하던 양적 성장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성을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탈추격’ 논의가 무성하다. 그러나 창조성에 대한 주장이 정권 홍보용에 그치지 않으려면 과학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가치 부여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다양성이 없는 곳에서 창조성이 나올 수는 없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