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범 / 평화연대네트워크 활동가

 
 
 
 
  전쟁은 한국에서는 모두 ‘전쟁’으로 번역되지만, 전쟁의 본질과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war)론과 전쟁수행 방식에 주목하는 전쟁양상(warfare)에 관한 연구는 서로 구분된다. 전쟁론은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이고, 전쟁양상연구는 ‘전쟁의 수행방식이 어떻게 구분되고 각각의 양상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혹은 ‘그러한 특징을 가져오는 요인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새로운 전쟁’은 전쟁양상 차원의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전쟁의 출현
 
  뮌클러는 <새로운 전쟁>을 통해 냉전 이후 새롭게 나타나는 전쟁의 형태 및 개념들을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한다. 그는 지난 세기 세계를 지배하고 분할했던 제국들의 주변부와 분할 단면에서 새로운 전쟁들이 출현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전쟁의 원인과 형태는 지역별로 상이하며, 더욱이 과거의 야만적 전쟁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최첨단의 기술들로 무장한 채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쟁은 안정적인 국가 건설이 이뤄진 곳보다는 대제국이 무너진 지역이나 건강한 국가건설로 탈식민화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지역들의 공통점은 건전한 정치 엘리트의 부재이며, 그로 기인한 국가·지역 경제의 붕괴다. 

  새로운 전쟁은 지구화와 관련된다. 기존의 전쟁은 클라우제비츠를 따라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 전쟁이며 그렇기에 정치적 합리성을 담보한 정치의 지속가능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는 전쟁을 통한 권력(정치)의 획득, 즉 국가건설로 귀결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전쟁은 그것과는 다르게 국가붕괴전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전쟁에 외부의 지속적인 정치적 개입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 전쟁들은 국가경제의 발전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계경제적 교환체계 속에 포섭돼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쟁의 수행양상은 파르티잔 전쟁과 비슷한 측면을 갖는다. 전방과 후방, 본토의 구분이 사라지고 도처에서 벌어지며 적과의 대규모 전면전은 기피된다. 모든 것이 동원되어 결정되는 최종적 시간도 장소도 없다. 이러한 전쟁은 지구전의 원칙들을 따라 수행된다. 하지만 기존의 혁명전쟁들이 차용했던 파르티잔 전쟁은 힘의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내와 신속성을 이용하여 방어로부터 공격으로 넘어가 종국에는 승리하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전쟁은 방어 전략에 머무르며 전쟁을 종결시킬 군사적 결정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보존을 목적으로 군사적 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캘도어는 새로운 전쟁 개념에서 핵심적인 것으로 ‘정체성의 정치’의 동원을 꼽는다. 정체성의 정치는 국지적인 동시에 세계적이며 초국가적인 형태를 띤다. 이는 ‘공포와 증오’의 씨앗을 통한 대게릴라전의 불안 조성 기법을 차용한다. 이러한 전쟁의 목표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 공포를 주입시킴으로써 주민들을 통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쟁의 전략적 목표는 공포와 증오에 기초한 극단주의 정치를 동원하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는 광범위한 위협 기법뿐만 아니라 대량학살과 강제이주 같은 다양한 수단을 통한 인구추방이 수반된다. 캘도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전쟁 사례를 통해 정체성의 정치라는 것이 외견상 전통적인 정체성에 기초한 권력 주장과 관련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오히려 새로운 세계화 과정에서 배제된 채 지방에 묶인 사람들 사이에 확대되는 문화적 불일치의 맥락에서 이해돼야 함을 주장한다. 동시에 새로운 전쟁 또한 세계적 탈구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정치는 국가권력에 대한 요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이것은 파편적이고 과거지향적이며 배타적이다. 새로운 전쟁의 전투집단은 이념보다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딱지에 대한 충성을 통해 정치적 통제를 확립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은 제거돼야 하며 이러한 공포를 수반하기에 정체성에 기초한 주민의 동질화 요구가 커진다. 그렇기에 영토 통제의 방식이 대중의 지지가 아니라 인구교체인 것이다. 주민들에게 어떤 희망이나 실질적인 혜택에 대한 전망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공포와 불안감, 그리고 타자에 대한 증오의 영속화에 의존한다. 따라서 음모에 동참하고, 혐오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며, 분열을 심화하기 위해 극단적이고 두드러진 잔학행위를 벌인다. 이러한 정치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근대국가의 구조, 특히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 국가의 해체나 잠식에 있으며 국가들의 정당성 상실이나 사회적 안전망이 해체되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의 정치지도자들은 국가 내 이질적인 집단들을 민족으로 통합하려는 기획에서 세속적 민족 정체성에 호소해왔지만, 점차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발전의 전망이 희미해지자 특수주의적 경향을 추구하게 된다. 이는 대체로 행정구조가 허약한 지역일수록 빠르게 확산됐다.

  새로운 전쟁 개념은 전쟁양상 범주에 속하는 연구이긴 하지만 이론으로 인정되기엔 한계지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새롭게 변화된 전쟁의 양상을 전지구적 차원의 변화로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주변부에 국한 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부터 존재해오던 부족 간 전쟁, 정체성의 정치 등의 재도래로 전쟁의 양상이 새로워진다고 말하기엔 곤란함이 있다. 나아가 전쟁 주체로서 비국가 행위자의 대두는 4세대 전쟁으로부터도, 중세의 귀족(전사)집단과 용병의 전쟁수행 역사와 종별성을 획득하기에도 부족하다. 하지만 새로운 전쟁 개념이 이전의 전쟁수행 양식으로서 하이테크 중심 전략을 도입하고 군사혁신(RMA)의 맥락에서 주도적 기동과 정밀 교전, 다차원적 방어 및 병참의 집중으로부터 완전히 탈각하고 재래식 무기와 게릴라, 테러전술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전선이나 전투원/비전투원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도심·마을과 같은 전장이 주를 이루게 되며 지역주민의 문화·종교적 성격과 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정치에 주목하는 것이고, 승리/패배의 경계의 모호함으로 인한 전쟁경제의 사슬 등을 전쟁양상에서의 중요한 점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캘도어가 새로운 전쟁의 전형으로 분석했던 90년대 발칸지역 역시 그러한 것들의 혼종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전쟁은 4세대 전쟁이 비판되듯, 전쟁양상의 역사적 변화를 요소론적으로 배열-분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묘사 차원의 해석이지 이것이 어떤 새로운 대안이나 관점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기각할 것인가, 전화시킬 것인가

  새로운 전쟁 개념을 둘러싼 쟁점들이 새로울 것 없는 것이더라도 그 쟁점들의 조합이 발생시키는 전쟁의 새로운 효과는 주목할 만하다. 또한 클라우제비츠가 지적했듯 전쟁은 카멜레온과 같다. 그것이 주는 함의는 ‘전쟁은 항상 그 순간에도 변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전쟁과 경제, 혹은 무기개발·생산과 경제위기의 극복이라는 연계지점의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21세기 들어 나타나는 전쟁 양상은 국가간 전면전(고정된 전선)이 아닌 도심과 지역에서 나타난다. 그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전장의 축소가 아닌 전장의 무한한 확대다. 이로부터 군산복합체라는 거대군사기업의 영역에, 시가지전투와 테러에 적합한 신무기들을 개발 ·생산하는 소규모의 민간군사기업이 등장한다. 특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도심전투 경험으로 새로운 종류의 진압무기들을 개발해 연간 무기 수출액만 70억 달러에 육박한다. 이들의 무기 중 대다수는 실제 전장이 아니라 지구화의 효과로 무너져가는 지역의 치안이나 테러, 마약조직 소탕 등에 사용된다. 전쟁은 단순히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 지역 곳곳에 스며들어 확대되는 것이다. 또한 지구화는 정치의 조건을 변화시킨다. 항상적으로 작동하는 경제위기는 대다수 민중을 삶의 최저점으로 몰아넣고, 그 속에서의 정치는 인민주의적이거나 인종, 민족, 종교 등의 1차적 동일성을 동원한다. 이른바 원한의 정치는 민족-사회국가의 위기 속에서 항상적인 폭력을 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우리는 전쟁양상 변화의 토대로서 자본주의하에서의 기술동학의 변화와 민족-사회국가의 해체를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전쟁이 단순히 과거의 재료들로 구성됐다는 비판은 기술동학의 변화와 민족-사회국가의 붕괴라는 쟁점과 마주했을 때에만 해소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전쟁이 자본주의 경제 동학의 변화라는 쟁점하에서 설명될 때에만 그 의미가 명확해질 수 있다. 나아가 새로운 전쟁은 전쟁 개념 자체를 변화시킬 것인데, 이는 전지구적으로 출현하는 다양한 조직화된 폭력들로의 확장을 말한다. 이로써 새로운 전쟁의 종별성이 구출될 것이고 구조화된 폭력의 확장이라는 보편성이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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