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체 / 시인

 

  얼마 전 영국 출신 미술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보러 국립현대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특유의 영국적 고집이 돋보이는 굵직하고 명징한 색감으로 붓질하고 포토콜라주를 통해 이미지의 재현에 끊임없이 의심과 불확정성을 어필해온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였다. 각각의 캔버스를 연결성 없이 따로 그린 후 그 50개의 캔버스를 연결해 높이 4.5미터, 폭 1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이 작품을 멀리서 바라보는 순간, 나는 울창한 나무숲으로 숨어 들어가는 기시감을 갖게 됐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미지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사진은 마치 미술보다 월등하고 우세한 장르로 취급돼 왔고 미술은 그러한 사진을 압도할 수 없었다오. 그러나 사실 사진은 그냥 그대로 이미지를 채워 넣는 데에 급급할 뿐이고, 미술은 이같이 허술한 사진의 기술적 구멍들을 채울 수 있는 힘이 있소. 사진과 미술은 서로 경쟁상대가 아니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 붙은 부제는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이다. 그는 이러한 크나큰 기획의 창작을 행하기 위해 사진이라는 작업을 실제로 그의 작품 인생 전반에 걸쳐 오랫동안 이행해온 바 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사진을 감상해온 이력으로 인해 이러한 큰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창작이란 쓰는 행위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쓰는 것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어냈다거나,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기분이 든 적은 없기 때문이다. 감상이라는 행위는 이보다 더 확연하고 분명하다. 사실 나는 ‘쓰는 행위’라는 것을 모종의 ‘창작’으로 수렴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로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이라는 만상의 일종으로서 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창작을 위한 감상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창작을 하려면 거짓부터 있어야 한다. 창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꾸민다는 것에 더 가까운데, 이 때문에 창작은 더더욱 거짓인 것이다. 그렇다면 감상한다는 것은 어떤 맥락에 있을까? 모든 종류의 감상은 창작의 지배를 받는 어떠한 식민지적 욕동의 하나이다. 요컨대 창작이 전제되지 않더라도 감상이라는 것은 가능한 것인데 이는 허위에 대한 영위, 허상에 대한 감상으로서 ‘감상’이라는 행위를 추동하는 것이 늘 있어왔던 탓이다. ‘감상’의 안티테제인 ‘창작’이 오히려 증례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때문에 감상은 2차적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요컨대 내가 해온 창작의 기저에는 창작을 위해서 감상을 해온 것이 아니라 감상을 위한 창작이 있던 것이며, 오로지 내가 감상하기 위해 그 감상의 대상으로서 창작을 완성해온 셈이다. 아무도 창작하지 않아도 좋으니 오직 그 ‘(행위)하지 않음’을 관망하는 것을, 사실은 내밀하게 바라고 있는 게 바로 창작하는 자의 진심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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