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 시인

 

 “끔찍한 아름다움이 태어났네.”

  나를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예이츠의 시 <1916년 부활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는 1916년 아일랜드의 ‘부활절 봉기’를 그리는데, 여기엔 그 사건으로 인해 가까운 이들을 잃어야만 했던 예이츠 자신이 느낀 슬픔과 당혹스러움 등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시는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그의 친구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농담을 나누던 이들, 젊고 논쟁적인 여자, 학교를 운영하던 이, 명성을 가진 이, 술주정뱅이에 허풍쟁이이던 이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시는 이어 말한다. 그들이 ‘자신의 때’에 이르러 완전히 변해버렸고, 결국 끔찍한 아름다움이 태어나고 말았다고.

  시가 전하는 그 깊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나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저 ‘끔찍한 아름다움’이란 말이 갖는 기묘함이었다. 나에겐 그 말이 도무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말로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 시에는 그들의 희생이 진정 유효한 것이었는지 의구심을 드러내는 구절까지 있었으니 내가 이상함을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일 터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는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잃은 영웅들을 기리는 데 뜻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고 영웅이 되어야만 했던 이들을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끔찍한 아름다움’이란 말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두고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은 현재에 속하지 않고 끝없이 과거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간다. 우리가 그것을 마주하고 있을 때조차 그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움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곁에 있는 이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더 이상 그를 돌이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끔찍한 일 아닐까. 

  일견 이 시에서 예이츠는 이 비극에 비통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도취된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움에 기울 것이냐, 끔찍한 현실에 기울 것이냐.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어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을 사는 예술가의 입장이다. 예술의 윤리와 시민의 윤리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고, 예술가란 예술에 몸을 던진 채로 여전히 시민으로서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자인 까닭이다.

  지난해에 펴낸 시집 <구관조 씻기기>에 실린 시 가운데 ‘세컨드 커밍’은 예이츠에 대한 나의 존경과 애정을 담은 오마주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가 도달한 것과 같은 지경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자신하기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현실에도 아름다움에도 기울지 않고, 현실도 아름다움도 잃지 않는 길은 예술가가 오래도록 꿈꿔온 길이지만 거기에 다다르는 항구적인 방법을 찾아낸 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스스로가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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