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2.9 수 12:16
기획사회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여준민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김슬기  |  skkim9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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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호]
승인 2013.10.02  15: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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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전체 수용자 3,975명 중 경찰에 의한 입소 의뢰가 3,117명, 구청에 의한 입소 의뢰가 258명이었다. 국가에 의해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신체 자유를 구속한 것이다.”

“면담자 대부분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 입소되었다.”

“일명, 근신소대로 불려지는 제7소대, 제13소대는 일상적 구타와 폭행이 자행됐다. 면담자들은 그곳을 ‘아오지 탄광’이라고 불렀다.”

“매주 월요일 아침, 일명 ‘인민재판’에서 반항자들에 대한 공개 구타, 공개 질책, 공개 협박이 진행되었다.”

“말 안듣는 사람들만 감금하는 격리실이 20개나 있다.”

“사망자 경우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검사의 지휘를 받아 사체 부검을 받아야 하는 규정을 무시하고, 북부산 의원 등에서 사망진단서를 받아 처리했다.”

▶ “양00의 경우, 임00에 의한 구타에 의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복지원’이 발간하는 <새마음 87. 1월호>에 수록된 86년도 사망자 명단에는 빠져있다.”

“개인 통장을 본 사람 혹은 갖고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 중 ‘1차 보고서’에 수록된 내용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돼 폭행으로 사망했다. 이때 35명의 원생이 집단 탈출하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 바로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당시 부랑인 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에는 약 3천5백여 명의 부랑인, 여성, 노인, 장애인, 아동이 강제 수용·감금돼 있었다. 그곳의 일상은 군대나 감옥과 다를 바 없었으며, 숙소 이름도 소대, 중대, 대대로 불리며 대장, 중장, 소장, 조장 등 수용인이 수용인을 감시, 관리하는 체계였다. 정당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직원은 거의 없었으며, 간호사, 식당근무, 청소, 빨래, 건물관리, 건물 신·증축 등 시설을 실제로 운영한 사람들은 수용된 원생들이었고, 상명하복의 수직구조를 통해 일상적인 강제노역과 폭력, 굶김, 감금, 학대, 성폭행이 자행됐다. 1976-86년까지 513명의 사망자가 있었지만 정확한 사망원인도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사건 이후 신민당 국회의원들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자들의 시신이 복지원 인근에 암매장 되거나 각 의과대학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는 진술을 수용인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7번에 걸친 재판과정에서 드러났듯 국가정책에 의한 것이라든가, ‘감금’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 등 문제의 본질은 왜곡됐고 정치권의 비호로 박인근(형제복지원 원장)이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것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규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있으니 그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사인에 의한 범죄’로 읽혀져야 할까? 형제복지원은 1960년 ‘형제육아원’에서 출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박인근은 1971년 보육시설을 부랑인시설로 변경하고 사회복지법인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시설 사업에 뛰어든다. 당시 육군 상사로 복무 중이던 박인근은 경찰서에 파견 나간 군인 신분이었다. 그는 “일본의 조총련에서 부랑인으로 가장한 사람들을 남한에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공문을 접하고 나서, 이에 대한 부응으로 거리의 부랑아(인)을 수용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2010년 스스로 제작한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총 14권)에서 회고하고 있다. 박인근은 1975년 <내무부훈령 410호>라는 ‘부랑인등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라는 업무지침이 치안본부와 내무부의 합작품으로 진행되자 ‘수용시설’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정부로부터 국유지 사용 허가를 받고 수용인들의 노동착취로 시설을 증축해 나가며 자신의 출현금 한 푼 없이 시설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수용인의 머릿수는 지금과 다를 바 없이 그 자체가 돈이었다. 정부 보조금은 사람 수대로 지급됐고, 열악한 의식주와 의료 방치에서도 알 수 있듯 보조금은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고 개인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통해 모든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며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했는데, 마을의 통·반장을 예비군 출신으로 하고 한 달에 한번 정기모임을 통해 수상한 거주인을 색출할 정도였다. 그들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불량한 느낌이 있거나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없다고 판단되면 삼청교육대 혹은 이러한 부랑인 시설로 강제로 배제, 감금했다. 세월이 흘러도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국가적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수용됐던 피해자들은 무시무시한 폭력·학대·감금 등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데 반해, 가해자였던 박인근은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로 살면서도 “국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며 죽기 전에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끈질지게 몸부림 치며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은 정의롭고 맑은 사회를 꿈꾸는 모든 이를 참혹하고 슬픈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그렇다면 뒤틀리고 왜곡된 역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까? 당시 수용인들은 힘없고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리에서 껌을 팔거나 술을 마시거나 혹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누군가 경찰에 이야기해서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범죄자가 아닌 선량한 시민이었던 것이다.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이후 그들의 삶은 어떠할까? 관계부처 대책회의 등 소란을 피웠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군인 출신의 강력한 통솔력을 갖춘 사람”을 후임 원장 후보로 거론하는 등 역시 운영과 유지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을 뿐, 그 안에 살았던 수용인 대부분은 집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생활하다 또 다른 수용소에 갇혀야 했다. 망상에 사로잡혀 정신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있거나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이는 삶을 살고 있고, ‘형제복지원’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소름이 끼친다는 증언도 있었다. 피해자 한종선씨는 여전히 불 꺼진 어두운 방에는 들어가지 못하며 폐쇄공포증으로 자가용 탑승 조차 꺼리고 있다. 또한 수면제를 복용하는 날이 많을 정도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당시 함께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그의 누나와 아버지는 현재 26년째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다. <월간 조선>(2012. 9)과 인터뷰를 했던 피해자 박복달 씨는 역시 폐쇄 후 지금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형제원에 봉고차 타고 갔어요”, “형제원에서 맞았어요”란 말만 반복하는 등 피해자들의 이후 삶은 희망을 저당 잡힌 ‘살아지는 삶’ 그 자체다.

  지난 6월부터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준)>는 25명의 피해자들을 만났다. 대부분 ‘형제복지원’이란 악령에 사로잡힌 채 26년을 숨죽여 살아야했고 온전한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반면 박인근은 형기를 마치고 나와 다시 이름만 바꾼 채 사회복지법인을 계속 운영해왔으며 26년 동안 형제복지원 → 재육원 → 욥의 마을 → 형제복지지원재단 등 4번에 걸쳐 법인 이름을 바꿔왔다. 2002년에는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법인 명칭 변경 후 2011년 셋째 아들인 박천광에게 이사장 직을 물려주었다. 현재는 법인 산하 ‘실로암의 집(36명 거주)’이란 중증장애인요양시설 하나만 딸랑 운영하면서 사우나, 온천 등 법인을 핑계로 네 가지 수익사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박인근의 비리, 부정은 그 때 그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9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부산저축은행 사건이 터지고 나서 형제복지지원재단 역시 2004-09년까지 118억 원을 법인 이름으로 불법 대출받은 것이 드러난 것이다.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 사건으로 지난 해 부산시는 특별감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13건의 지적사항이 있었다. 사안에 따라 △시정조치 △검찰에 고발 △검찰에 수사의뢰했으나 올해 9월 현재까지도 검찰의 수사결과는 발표되지 않고 있다. 또한 감사결과 부산시 공무원 16명이 연루된 것이 확인됐으나 모두 주의, 경고 등 가벼운 경징계에 그쳤다. 한 사건에 16명의 공무원이 연루된 어마어마한 공무원 비리, 결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부산시는 지난해 당시 박인근이 치매라는 이유로 “더 많은 사실들은 확인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들 쉬쉬하면서 혼자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거에요. 지워지지 않거든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진짜로 개, 짐승만도 못하게 그곳에서 살았으니 박인근은 우리한테 사과 해야죠. 무릎을 꿇든지 뭘 하든지. 박인근 뿐만 아니라 전두환도 했으면 좋겠어요. 전두환이 지시한 거잖아요.”

“부모 밑에서 학교 다니고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평범하게 성장하는 과정으로 왔으면 평범하게 안 살겠나…뭐 그런 아쉬움이 많죠. 그런 시간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가나 봐요.”

“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왜 이렇게 힘들게만 살아야 하는지, 항상 의심이 들어요. 삶에 당위가 없어요. 그 핵심에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있죠.”


이제는 우리가 이들의 목소리에 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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