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우 / 문화평론가


새로운 도로 만들기
 

 
 


Q. ‘히치하이크’가 가지는 개념적 다의성―예컨대 무임승차, 합승, 환승을 통해 생성되는 임의의 교통관계―을 생각해볼 때, 한국사회가 당면한 사회정치적 코드/이슈들 혹은 그런 사건들에 개입하는 주체들이 가지는 목적의 다양성과 이 개념을 연결짓는 것은 어떤 함의를 가진다고 보는가.

A. 지금 한국사회는 다양한 히치하이커들이 모두 뛰쳐나와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다. 한여름 밤 광장을 뜨겁게 달구는 촛불시위에 모인 이들이나 크레용팝의 일베 논란을 둘러싼 목소리도 그 중 하나다. 박정희나 민주당, 진보당 등 정치적 이슈에 관한 목소리들이 있는가 하면, 청년 알바나 재능교육과 같은 특수고용 비정규직 문제가 상존하고 있다. 홍대 앞 인디뮤지션들이 있는가 하면 미디어 자본과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순식간에 수십억을 벌어들이는 가수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이처럼 수많은 히치하이커들의 욕망을 살피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차량에 탑승하고자 애쓰는 이들부터, 때론 자기 앞에 와서 정차하는 차량까지도 선별해서 탑승할 수 있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존재한다. 그중 20-30대 청년 세대의 상황은 색다르면서도 중요한 측면을 갖는다. 그들은 과거의 정치구도나 권력관계를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삶에 대한 비교적 뚜렷한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실과 욕망의 간극은 너무 커서 좀처럼 좁힐 수 없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겚망뗌岵� 문제다. 그들은 점차 자신들의 욕망의 종착지를 포기하거나 외면한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국면들이다. 이때 그들이 가진 순수함은 전혀 다른 차원을 제공한다. 히치하이커로서 청년 세대는 이 상황을 무목적성의 형태로 드러낸다. 그들은 차를 타고 이동해서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를 타는 행위 자체 혹은 중간에 다른 차로 갈아타는 것에 대한 유희와 즐거움을 선택한다.
 

Q.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그에 따른 사회적 반향들―특히 촛불문화제를 중심으로―을 살펴보자면, 이는 ‘담론’의 주체(개별적 가치관과 의지로 참여하는 이들)와 ‘대의’의 주체(해당 사태의 당사자로서 대의를 가지고 참여하는 이들) 사이의 어떤 균열지점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각각 자발적 참여의 의지와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만,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앉은 이들의 ‘합승’에는 불편한 연대감이 항상 표출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당사자운동의 한계나 먹고사니즘(개별화, 파편화)의 문제로 보는데.

A.  현실 정치는 항상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치의 숙명이다. 본 기획의 맥락을 따라 표현하자면 히치하이커들의 욕망, 즉 주체의 개별성이 갖는 특이성을 대의로서의 정치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촛불 정치라고 말할 수 있는 현 정세는 너무나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다. 먼저 촛불 정치의 반복성에 따른 무력감이다. 현대사회는 항상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한다. 인터넷과 SNS 환경은 새로운 것을 순식간에 낡은 것으로 바꿔버린다. 그것이 연예인 자살이건 존속살해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한 반복은 사회적 전복이나 혁명적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2000년대 이후 다양한 촛불 정국은 혁명적 상황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상황의 반복에 그쳤을 뿐이며,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한다. 물론 점점 촛불에 참여하는 숫자는 늘어날 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숫자가 10만인가 20만인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발화이다. 발화 가능성이 없는 불능의 상황이 작금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 어떤 것도 잉태할 수 없는 불임의 상태에 가깝다. 경찰 차벽에 둘러싸여, 꺼지지는 않지만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는 안전한 촛불들만이 반짝거린다.  그 내부는 다양한 목소리의 연대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사실상 이는 연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갈 곳 없는 이들이 모여든 일시적 광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박근혜정권이라는 가시적 적대자를 비롯해 자본주의ㆍ신자유주의 등의 가상의 적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뛰쳐나온 다양한 주체들이 공존한다. 그들은 어쩌면 ‘현실에 대한 분노’라는 하나의 공통점만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공통분모는 하나의 단일한 집단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나 분위기일 수 있다. 작금처럼 민주당 같은 정당이 개입하는 순간 그러한 정서나 분위기는 반복과 퇴행의 길을 가게 된다.


Q.  자신만의 토대를 사수하며 상징적 권력에 휩쓸리지 않을 권리의 주체들, 혹은 그러한 토대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서는 우리 시대의 히치하이커들. 이들 모두는 어쩌면 서로의 극점에서 출발해 하나의 누빔점을 형성한다. 다만 이러한 점 바깥에, 그 어떤 것에도 속하지 못한/않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양적, 물적 개체수를 통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하지 못할 미래의 목적지로부터 이미-항상 배태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의 여정은 어떻게 계획돼야 하는 것일까?

A.  현대 사회에서는 제도로서의 정치뿐만 아니라 저항의 공간 또한 대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실질적으로 제도권과 비제도권(시민운동영역)은 대칭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관계는 상호 적대적이며 동시에 상호 보완적이었다. 비제도권은 제도권으로의 진입을 전제하고 있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소위 운동권 출신이거나 시민운동가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에 대한 방증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된 개념은 ‘시민’이었다. 시민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계급을 나타내거나 지향할 뿐이다. ‘시민 아닌 사람’은 과거에 ‘국민 아닌 사람’이 겪었던 것 이상의 차별과 배제, 멸시와 통제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사회적 소수자나 부적응자, 일탈자, 노숙자, 정신분열자, 실업자, 비정규직, 도시빈민 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앞으로도 지배 사회가 추구하거나 지향하는 지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환승이나 합승은 일시적 전략이나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기존의 도로에 구멍을 만들거나 돌멩이를 늘어놓거나, 아니면 아예 도로를 파괴하는 일이다. 항상 다니던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것, 히치하이커는 단순히 차를 얻어 타거나 환승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차와 길을 문제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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