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호 / <미디어 오늘> 기자

 

객관적인 주관성을 포획하자

 

 
 


Q.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익숙한 토대가 ‘무임’이라는, 즉 ‘알면서도 목적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무일푼의 현실이며 일종의 상상적 토대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인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문화적으로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정치/경제적으로는 항상 빈곤하다고 느낀다. 이는 우리에게 창의력과 상상력이 부족해서일까?

A.  우리에게 창의력과 상상력이 부족한 건 맞다. 하지만 그 창의력과 상상력이 개인적 의미의 상상력과 창조력은 아니다. 예컨대 이건희나 스티브 잡스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이건희는 “마누라랑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의 방식으로는 정치적 무일푼, 상상적 토대라는 현실을 깨달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상상력은 상상적 토대를 더욱 강화하고 우리를 더욱 정치적 무일푼으로 만든다.
  이러한 빈곤의 현실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성이 아닐까. 이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지배 권력은 사회문화적인 기제를 사용한다. 대중문화가 대표적인 예다. 사람들은 자신이 빈곤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방식은 모든 문제를 개인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극단화된 형태가 신자유주의다. 그런 개인적 의미에서 자신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일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건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이 사회 바깥에 무엇이 존재할 수 있고, 이 질서 역시 역사성을 지녔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상상력, 그리고 이 사회와는 다른 방식의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 창의력이 필요하다.
 

Q.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비타민’을 통해 이전의 정부들이 답습했던 정세의 그늘 속에서 무임승차를 반복하고 있고, 오히려 이를 통해 경제적 현실이 갖는 현실성 자체는 약화/악화되는 것 같은데.

A.  자본주의 사회는 늘 착취의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무임승차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 때마다 새롭게 무임승차 할 수 있는 기제들이 탄생한다. 우리는 이걸 ‘신 성장동력’이라고 부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자동차 산업이, 한국은 2000년대 초반 벤처사업이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라는 무임승차를 시도하고 있다. 중요한 건 창조경제가 ‘뭔가 새로운 건데 돈은 많이 버는 것’ 외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콘과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이야기하며 창조경제를 들먹인다. 결국 창조경제란 ‘텅 빈 기표’에 불과하다.
  우리는 새로운 무임승차 방식, 즉 신성장동력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일자리가 부족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사회를 움직이는 진짜 동력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상상적 토대와 결별하고, 기만적인 히치하이커들을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Q.  도시공간의 탈바꿈과 환승도 두드러진다. 문래동의 경우 도시재생(산)과 공공예술이라는 모호한 기표들의 연쇄(젠트리피케이션)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른바 ‘문래동 창작촌’이 형성되는 동안 철거민들은 여전히 축출됐고, 자본의 억압적 유입은 오로지 효율과 이윤 증대를 위해 넘실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문래동 창작촌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호흡을 불어넣자, 오히려 그 새로운 공간들은 사라졌고 공간의 주체들도 죽어가기 시작했다. 거대자본과 예술전문가 집단, 그리고 거주민들이 함께 욕망하는 문래동의 모습은 이미 상상 불가능해 보인다.

A.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뱅크시, 2011)란 영화가 있다. 그곳에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가 등장하는데, 뱅크시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원래 저항적인 성격을 지닌 예술가들이었다. 그런데 뱅크시의 제자가 이를 하나의 ‘산업’으로 만들어버린다. 예술의 창조성은 그렇게 자본주의적 창조성과 매우 쉽게 영합한다.
  이는 자본가들이 생산뿐만 아니라 ‘분배’하는 방식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아무리 좋은 예술작품을 생산한다 해도, 그것은 예술가들이 상상하고 바라는 방식대로 사회에 ‘분배’ 혹은 ‘유통’되지 않는다. 그 분배/유통방식은 이미 결정되어 있거나 누군가가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결정한다. 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히피문화를 상품으로 흡입시켜버린 것이 자본주의가 지닌 분배방식의 힘이다.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자본주의를 바꿀 수 있다거나 저항의 예술이 가능하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무임승차의 사회를 바꾸지 않는 한 예술은 대부분 이 사회의 상상적 토대를 유지하는 데 복무한다.


Q.  어떤 여정에 항상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한국 사회의 히치하이커들에게도 확고한 목적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정치가들, 광화문과 송전탑 앞에 나앉은 이들, 예술가들, 철거민들, 그리고 수많은 담론의 주체들은 지금-여기에서 우리의 이정표를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지속적인 연대가 일어나기 위해 어떤 안내서가 필요하다면, 그 첫 장에 쓰여야 할 내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A.  로버트 카파는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히 현장에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현장이다. 운동권이 되어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더 많은 연대를 이뤄내기 위해 굳이 감동적인 메시지를 짜내거나 선전ㆍ선동문구를 억지로 만들 필요가 없다.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 송전탑 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야 한다. 우리가 연대해야 할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그대로 올곧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무임승차가 있다면 무임승차로 인한 피해자들이 있다. 사회에 기여하지 않으면서 사회가 생산해낸 생산물의 혜택을 누리는 프리라이더들이 있고, 이 프리라이더들에게 착취당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 사회는 무임승차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로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하고, 내 친구와 내 가족을 그들의 목소리와 만나게 해야 한다. 가장 객관적인 것이 가장 주관적인 것이다.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면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기 마련이고, 이것이 연대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히치하이커들이여, 현장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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