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광 / 고려대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교수

   많은 사람들이 과학 발전을 좋은 것으로만 생각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계몽주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뿌리 깊은 과학주의, 즉 과학이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의 산물이다. 이 믿음은 과학이 발달하면 그 혜택이나 폐해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질 것이라는 보편성의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프랜시스 베이컨이 17세기에 꿈꾼 과학자가 다스리는 신천지 <뉴 아틀란티스>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이상이 실현된 적은 없었다. 근대과학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그런 이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과학이 진리 추구와는 거리가 멀고 특정한 패러다임이 요구하는 문제풀이 활동임을 간파했고, 이후 수립된 과학사회학을 비롯한 과학기술학은 과학이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실행이고 사회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구성물임을 밝혔다. 1990년대 이후 신과학정치 사회학(new political sociology of science, NPSS)을 주창한 학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조류 속에서 과학지식 생산 양식에서 과거와는 사뭇 다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과학기술의 상업화가 일회적이거나 국소적 현상이 아니라 전 지구적 사유화체제로 구조화되었고, 그에 따라 지식생산을 위한 자원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구조적으로 편향되어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로 치중되면서 정작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은 생산되지 않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헤스와 같은 학자는 이처럼 과학연구에서 환경, 보건, 안전, 윤리 등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간과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수행되지 않은 과학’이라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GMO나 나노기술의 개발을 위해 엄청난 자금이 투여되지만 정작 이런 기술의 안전이나 윤리 등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상태다. GM작물의 위험에 대한 연구는 1998년 푸스타이 박사의 연구 이후 십여 년이 지난해에야 프랑스의 세라리니 연구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푸스타이 박사는 연구 발표 이후 해고되고 자료를 압수당했고, 세라리니팀도 집중적인 견제와 비난에 시달렸다. 헤스는 이러한 현상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지식의 비생산에 따른 구조적 결과라고 말한다. 즉 공익적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게 가로막는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들은 GM 식품을 먹고 나노기술이 적용된 화장품을 이용하면서도 위험성에 대해 알지 못하며 그것은 의도된 무지, 또는 강요된 무지인 셈이다.

  이처럼 과학지식과 기술의 생산이 자본에 의해 특정한 방향으로 편향되는 구조적 원인 때문에,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사회적 불평등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1980년대에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던 정보 격차는 인터넷과 컴퓨터의 발전이 소득이나 지식수준이 높은 사회적 상층부에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으로 작용하는 반면, 하층 계급은 이러한 혜택을 상대적으로 덜 누린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러한 격차는 생명공학, 나노기술, 의료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개발된 신약은 투자비를 회수하기 위해 고가로 판매되기 때문에 특허가 끝나기 전까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그 혜택이 국한된다. 최근 특허기간이 끝난 백혈병치료제 글리벡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글리벡은 백혈병 환자들에게 꿈의 치료제로 불렸지만 너무 비싼 약값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과학은 오랫동안 객관적 진리 추구로 간주됐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성과 중립성 신화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본에 긴밀히 포박되어 있고, 바로 그 때문에 과학에 대한 사회적 비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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