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25-30일까지 금강산에서 박근혜정부와 북측이 어렵사리 합의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고 한다. 금강산관광 재개 또한 이달 말 남북 실무회담을 통해 탄력을 받을 예정이다.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즉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라는 ‘인도적 문제해결’과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정상화라는 ‘교류ㆍ협력을 통한 신뢰회복’의 두 축이 함께 엿보이는 듯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이 공허한 잠언처럼 들릴 때가 있다. 아니 어쩌면 항상 그렇게 느낀다. 우리는 더 이상 개인적 소망을 쉽게 국가적 통일이라는 공동체적/전체주의적 갈망 속에 투영시킬 만큼 순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과학자를 꿈꾸던 세대를 지나, 부자와 연예인을 꿈꾸는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이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허무맹랑함을 꼬집곤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전히 그 노랫말 속에 담긴 ‘인도주의적’ 의미화는 유효하다. 연평도에 총성이 빗발치고 개성공단의 불이 꺼졌다가도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카드는 새 정부의 가장 적절한 정치적 제스처로 각인된다. 그런 인도주의적 정부의 모습은 결코 새롭지는 않으나 여전히 이산가족을 포함한 국민들에게는 큰 위안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이 8.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거국적인 평화의 제의를 하는 동안, 광화문 ‘인디스페이스’를 비롯한 몇몇 상영관에서는 조용히 한 다큐멘터리가 개봉됐다. 제목은 <그리고 싶은 것>(권효, 2013). 영화는 2007년부터 한ㆍ중ㆍ일 작가들에 의해 진행된 ‘평화를 주제로 한 그림책 공동출판 기획’을 통해, 권윤덕이라는 작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심달연 할머니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그림책(<꽃할머니>)을 제작하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 속에서 그림책의 완성은 권윤덕 개인의 반복적인 유보와 전진을 통해 한 지점에 다다르지만, 결국 우익의 반발을 우려한 일본 출판사의 출판 연기라는 현실 속에 놓인다.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위안부 피해자’라 불리는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제스처란 여전히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현실 속에서만 존재한다. 권윤덕 작가가 고민했던 지점 또한 일본 출판사 대표의 눈물이라는 국가적인 장막을 벗어나고자 했으나, 바로 그 국가적 평화라는 제의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이같은 이질적인 상황은 확실히 어떤 사고의 불가피함을 동반한다. 그 사고란 대략 ‘큰 평화를 향한 일보 전진과 작은 평화들의 일보 후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여기서는 ‘국가적(간) 평화’라는 쟁점이 국민이 아닌 국가 자체의 평화로 치환되는 모습도 발견된다. 이산가족 상봉과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이라는 두 축을 단순비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정치적 선택에 따라 두 축이 가진 무게가 다르게 계산된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이 가진 상징적 공허함 만큼이나 ‘이산가족’, ‘위안부 피해자’, 나아가 ‘평화’라는 개념의 의미를 국가라는 틀 속으로만 한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7만여 명과 57명. 현재 생존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수와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의 수다. 그들 모두에게 크든 작든 평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며, 그들이 언젠가 완전히 사라져갈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해답이 국가 자신의 평화로움인 것은 아니다. 외려 그들에겐 국가야말로 가장 위험한 불화의 씨앗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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