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의 첫인상은 어딘가 생경했다. 그곳은 분명 서평부터 신변잡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글을 올리는 비공개 인트라넷(군 내부 통신망) 게시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책마을은 이 세계에 없는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이뤄지는 언어의 가역작용이 외부의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은 더욱 없었다. 책마을에서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수많은 담론들에 관한 담론들이 펼쳐졌다. 누군가 헤겔과 칸트를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보르헤스를 이야기했다. 또한 역사ㆍ경제ㆍ문학ㆍ정치ㆍ철학 등 수많은 분야의 전공자들이 스스럼없이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책마을은 사회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이 아니더라도 활동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오히려 학생이라는 신분(혹은 계급) 자체가 문제시되는, 일종의 사이버-학문공동체였다.

  다만 거기에 ‘생활’이라는 단어가 개입되면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폐쇄적이었던 책마을과 달리 생활세계가 가지는 무게는 그 구체적인 양태를 실현해가는 데서 발생한다. 수유너머와 같은 꼬뮨이 생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것은 일상생활과 학업, 경제생활 등 전반적인 삶의 재구조화를 의미한다. 부모로부터의 독립(나아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을 어렵사리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공유하는 생활이라는 측면을 간과한다면, 실제로 그것을 살아내기는 힘든 셈이다. 실제로 책마을에서도 이같은 논쟁이 있었다. ‘공동생활전선’을 시작함에 있어 방점을 찍어야 하는 곳이 ‘생활’인지, ‘전선’인지에 대해서 말이다(아마 잠정적 결론은 후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성차의 극복과 연애의 문제도 중요한 논쟁거리다. 비교적 성공사례인 수유너머 또한 이러한 문제를 겪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따로 또 같이’를 표방하는 (학술)생활공동체의 구성원이 가지는 사회적 관계 자체다. 맑스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서 개인의 본질을 정의내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특히 꼬뮨이나 생활공동체 같은 집단 내에서 관계의 새로운 형성이라는 지점을 예민하게 살피는 작업을 선행ㆍ지속해야 한다. 앙상블의 구조와 성격이 변화한다면 개인 또한 그에 맞춰 변하고, 이러한 적응ㆍ갈등ㆍ이해 중층적인 결들이 ‘생활’이라는 요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생활공동체의 실패는 여기서 일어난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유연함과 끈질김을 방증한다. 아직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움직임은 걸음마 단계다. 다만 이러한 아포리아를 돌파할 어떤 동력은, 바로 그것을 생산하는 구체적인 생활을 판단중지시키는 것에서부터 생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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