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호 / <미디어오늘> 기자


  한 지인은 공동생활전선(이하 공생전)이라는 이름을 듣고 ‘군대’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공동생활전선은 군대에서 탄생했다. 군인들이 모여 독서와 사회문제에 이야기하던 군 인트라넷 ‘책마을’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2009년 9월 누군가 책마을에 2008년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청춘의 종언’ 좌담회 내용을 옮겨 놓았다. 이 좌담회에서 우석훈을 비롯한 어른들은 20대를 불안한 세대로 규정하며 요즘의 20대는 반항, 도발, 상상력, 순수, 열정이 없으며 계급적 열등의식을 체화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책마을의 군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한탄하기도 하고, 어른들을 욕하기도 하면서 격렬한 논의를 벌였다. 그러던 중 훗날 공생전의 구성원이 된 양제열이 ‘우리는 88만원 세대인가’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88만원 세대들의 당사자 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이유를 “20대 대부분이 부모님 집에서 살며, 등록금을 지원 받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부모가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 데리고 사는 것은 한국사회의 기본적인 합의다. 그러나 양제열은 이러한 기본적 합의가 20대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주거권(집 값 문제), 교육권(등록금 문제), 노동권(일자리 문제) 등 20대 문제를 이루는 세 가지 큰 축들에 대해 20대 본인들의 반발과 저항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20대들이 실질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당사자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은 김예찬이 ‘공동생활전선’이라는 기획을 떠올렸다. 이는 20대들이 경제적 자율성을 가지고 공동생활을 하는 문화가 생긴다면, 실질적으로 가계 부담을 줄일 수 있을 뿐더러 20대들에게 당사자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느냐는 제안이었다.

  한마디로 공생전은 일종의 ‘20대 당사자’ 운동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20대 당사자 운동은 왜 실패하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운동이다. 김예찬의 제안 이후 다양한 사람들이 공생전에 모여들었다. 우리는 수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공생전의 문제의식을 정리했다. 첫째, 현재 20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세대론을 비롯한 20대에 대한 규정은 어른들이 생산하고 있다. 일단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담론적 주체’가 돼야 한다. 둘째, 담론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부모랑 같이 살면 집회나 정치활동도 제대로 못하고,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가족의 품에서 떠나 자립해야 한다. 셋째, 물질적 조건이 충족된다 해도 이제는 찾기 어려워진 ‘연대’와 ‘투쟁’이라는 상실된 가치를 되살려내지 않는 이상, 20대 운동은 마치 지금 학생운동이 처한 상황처럼 일부 특이한 애들의 소란으로 여겨질 뿐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20대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 20대가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주제들을 다룰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문제제기들을 20대에게 일반화된 매체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세 가지 문제의식에 따라 우리의 과제는 경제적 자립, 이론적 학습, 담론 투쟁으로 정리됐다.
 
  이를 위해 우리가 선택한 것은 ‘가출’이었다. 한 사람의 주체로서 물질적ㆍ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가출이라는 생활양식의 전면화! 우리는 20대가, 그들이 속해 있는 ‘부모=어른’들의 영향권 밖에서 설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20대 운동’이라는 것이 정말로 당사자들에게서 촉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여 명의 공생전 구성원들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자기만의 방’(우리는 이를 ‘땅굴’이라 불렀다)을 얻었고, 그중 4명은 땅굴에서 상주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땅굴을 들락날락하며 생활했다. 그곳에서 삶을 공유하고 세미나를 통해 학습했다. 매주 토요일 아침 ‘토요살롱’이라는 행사도 열었다. 각자 철학ㆍ정치ㆍ경제ㆍ예술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글을 쓰고 토론했다.
 

공동체 건설의 실패와 남은 질문들


  이같이 담론적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우리의 모험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의 기획은 ‘실패’로 끝났다. 지난해 8월, 공동생활전선은 완전히 해체됐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우리는 공동체를 만들지 못했다. 물론 4명의 남자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삶을 유지하기는 했다. 하지만 몇몇은 늘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부담스러워했고 청소와 설거지, 빨래, 밥하기 등 집안일은 제대로 분담되지 않았다. 사회운동과 학업에 지친 우리는 땅굴을 우리의 삶을 공유할 진지가 아닌 잠만 자는 숙소로 사용했다. 즉 가족으로부터 독립은 했으나 새로운 공동체는 꾸리지 못한 것이다.

  담론 투쟁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구성원 중 한 명이 ‘성매매를 노동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민감한 주제의 글을 공개했고, 이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판을 쏟아낸 외부의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공생전 구성원들이 다시 한 번 문제를 제기했고 그 과정에서 감정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담론 투쟁을 시도할 하나의 ‘주체’, 혹은 ‘덩어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공동생활전선은 자립을 꿈꾸었으나 공동체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국가권력에 저항하면서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자본에게 착취당하면서도 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으나 실패했다. 공동생활전선은 우리에게 ‘앞으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며 하나의 모험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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