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 / 계원예대 교양학부 교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상은 자본주의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양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름난 경제매체는 자본주의가 결함투성이라고 대서특필했고, 경제학자들은 효율적 시장가설이라는 신고전학파 경제학 교설은 파산했다고 고백했으며, 사람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읽을 시간이 왔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는 사이 조용히 창문을 통해 빠져나간 신자유주의는 다른 창문을 넘어 더욱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초래한 위기의 해법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굳건한 단련의 기회를 마련해준 듯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러한 시야 속에 구제금융 이후의 경제 위기와 유럽 여러 나라를 덮친 국가부도 사태를 해결할 묘안은 오직 ‘긴축’뿐인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연금과 사회보장, 노동자의 미래 소득을 볼모로 삼는 긴축이란 이름의 잔혹극은 유럽연합이 종내 해체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낳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금융자본이라는 소유자계급의 완강한 저항과 타협을 가리키는 이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슬슬 깨닫는 중이다. 그런데도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라는 추세에 대응하는 어떤 정치적인 상상은 찾아볼 수 없다. 마치 금융화가 새로운 모습으로 펼쳐지는 계급투쟁의 형태가 아니라는 듯이. 그것은 정치와는 상관없는 경제의 자기 운동을 일컫는 이름이란 듯이.

  새 정부가 집권했다. 창조경제라는 대안을 선택하고 경제민주화가 불가역적인 시대의 흐름이라고 천명했다. 그것의 속내가 무엇인지 오리무중인 가운데, 그나마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가 드러났다. ‘국민행복기금’과 ‘4.1 부동산 종합 대책’ 같은 것이 그것이다. 힐끗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못 먹어도 고!”와 같은 막무가내의 현상 유지책이다. 국민행복기금은 신용회복기금을 이름만 바꿔 신장개업했을 뿐이고 대출로 인한 막대한 수익을 얻은 금융권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악평에 시달리고 있다. 부동산종합대책은 더욱 가관이다. 한마디로 부동산경기부양을 위해 계속 빚을 내어 집을 사라는 것이다. 결국 집값을 살리고 건설업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은행이 살고 금융이 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이 두 마리의 말이 무릎을 꿇는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빤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경기를 부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금융위기라는 시한폭탄은 여전히 돌아갈 것이다. 천이백조 원에 달한다는 가계부채는 이제 GDP에 육박하고 있다. 거기에 누적되어온 국가부채 역시 줄어들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위기’의 전조들 앞에서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듯 망연자실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거품과 광기, 집단공황 그리고 위기라는 극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시나리오를 우리는 되뇌야 할 뿐일까. 이런 서사에는 흥미로운 허무주의가 드리워져 있다. 광기와 패닉이라는 심리적 표상은 경제적 질서를 제어할 수 없는 무능함에 대한 비관적인 체념을 은밀하게 운반한다. 따라서 경제학이 버젓이 거품과 패닉, 광기와 같은 용어를 경제적 운동을 제시하는 과학적 지식으로 채용할 때 우리는 놀라게 된다. 그런 표상은 위기 이론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적 표상의 한계를 보여줄 따름이다. 금융 위기의 형태로 언제나 현상하는 자본주의의 위기는 마치 경제현상과 관계없는 심리적인 변덕에 좌우된다는 듯이. 또한 위기라는 전격적인 파국의 순간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떤 정치적인 결정도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러므로 자본주의 경제적 표상은 위기 이론이 없는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위해 경제학의 잔여라고 할 만한 것, 반경제적인 표상이라 불러도 좋을 심리적 표상을 항상 채용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와 광기라는 모습으로 자본주의의 운동을 재현한다. 그러나 그런 기이한 경제적 표상의 진정한 비밀은 바로 경제적인 것의 정치적 결정이라는 계기를 숨기는 것이라면 어떨까.
 

주권적 국가와 금융화의 정치


  광기의 드라마로 각색된 위기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조용히 이성적 질서를 부과하는 신비한 주체를 불러낸다. 최종대부자로서 구제금융을 비롯한 처방을 내놓으며 사태를 수습하는 국가는 신자유주의가 추앙했던 자유주의적인 대의민주주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는 서로 다른 이해와 정체성을 대표하는 협치의 정치와 정체성의 정치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치의 공간을 찬양했다. 그렇지만 이제 그곳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라는 초월적인 규범이 활약하는 장소가 된다. 그 장소의 이름은 당연히 국가다. 금융화라는 자본주의적 축적 위기의 탈출 시도와 그 파국적인 결과를 수습하고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갑자기 사지에서 돌아온 것과도 같은 국가를 만난다. 그러나 그 국가가 어제까지의 국가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가정되어 있었으면서도 역시 늘 망각되어왔던 주권적인 국가다. 이미 주어진 사회적 편성을 가정하고 그에 속한 각 부분이 자신을 대표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라면 그것을 초과하는 보편적인 결정의 장소로서의 민주주의는, 분명 우리에겐 새삼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권적인 국가를, 서로 다른 이해의 타협적인 중재를 통해 일반적 이해를 축조한다고 믿는 국가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후자의 국가는 전적으로 환상일 것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대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주권적인 국가는 기꺼이 이데올로기 외부에 놓인 국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대표 혹은 대의라는 것이 근본적인 결정이 없이 이미 결정된 세계에서 이뤄지는 행위라면 주권적인 선택은 바로 그 근본적인 결정을 가리키는 개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최종대부자로서의 국가라는 형상을 생각해보자. 그 국가는 아무런 현실적인 지지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그 국가는 자신이 대표하고 반영해야 할 현실과 상관없이 말 그대로 허공에서 화폐를 만들어낸다. 허공이라는 텅 빈 장소 아니 비장소에서 교환의 일반적인 네트워크를 생산하는 국가야말로  그런 주권적인 주체의 모습 그 자체 아닐까.

  따라서 우리는 금융화의 정치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금융화의 정치란 것이 말 그대로 금융 위기라는 현실적인 상태에서 각 집단의 이해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결국 자본의 편에서 위기를 해결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가난과 실업으로 가득 찬 삶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국가와 금융자본, 유권자 사이의 갈등이 금융화의 정치라는 발상은 너무나 순진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금융위기로 인한 자본제적 위기의 순간에 그것은 이해의 갈등이 아니라 실은 국가가 보편성의 화신으로 행세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금융화의 정치를 악마화된 금융업자의 거액연봉을 규탄하고 온갖 파생상품을 만들어낸 투자금융기관과 투기적 화폐자본의 국제적 운동을 규제하는 것과 같은 문제로 축소할 수 없다. 20세기 초 금융 위기를 겪으며 등장한 케인즈주의 사회국가는 이해의 대표로서의 정치가 마비되는 순간 바로 정치적 결정이라는 것을 통해 출현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에 의한 정치의 결정을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했던 알튀세르의 생각을 다시금 찾아보아야 할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굳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더라도 경제가 정치를 결정하는 것을 잘 안다. 반면 위기의 시기에 우리는 주권적인 국가의 모습으로 사회적인 것 자체를 재구성하는 결정의 주체로서의 국가와 상대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바로 경제에 의한 정치의 과잉결정의 순수한 모습 아닐까. 경제는 이제 정치에게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결정하는 역할을 떠넘긴다. 이때 그 정치적인 결정을 경제적인 고려와 이해의 문제로 돌리려는 것이야말로 가장 퇴행적인 주장이다. 경제주의라는 해묵은 개념을 다시 꺼내들자면 그것이 바로 경제주의의 진수일 것이다. 나아가 금융위기는 자본주의를 정치적인 결정의 문제로 삼는 희귀한 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 정치를 감당할 수 있을 정치적 결정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루한 장기적 금융위기의 반복을 겪을 것이다. 그동안 결정의 주체로 스스로를 조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잔인한 자본의 겨울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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