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우 / 사진학과 교수


지난해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일요일에 가끔씩 ‘게으른 일요일(Lazy Sunday)’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갖기를 제안했다.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그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손에 들고 오지 말고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바로 달려온 모습으로 모이자고 제안했다. 낭만적인 바람이었을까? 그런 모습으로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스마트폰과 타블릿 컴퓨터로 무장된 이들에게 아마도 수업이 아닌 이 시간은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오랜 유럽생활에 익숙해 있던 나는 어디에서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짧은 시간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청년들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그 스마트폰 덕에 이제는 실수를 하기가 어려워졌다. 카페에서 약속시간에 늦는 여자친구를 오래 기다리며 걱정과 그리움, 관계를 음미하거나 갈등을 느낄 기회는 이제 영영 사라졌다. 하지만 쓸모없이 보이는 기다리는 시간, 지루한 시간, 빈둥거리는 시간들은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꿈틀거리고 자라나는 소중한 시간들이다. 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 뒤에는 수없이 지새운 사색의 밤들과 별 것 아닌 일상의 시간들이 있다. 지루함을 빼앗아간 이 스마트한 전화기로 어느덧 우리는 사진을 마구 찍고, 지우고, 주고받는다. 36컷만이 담겨있던 필름을 쓰던 시절에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듯 한 장 한 장이 신중하고 또 조심스러웠다. 필름값이 들지 않는 디지털 방식인 지금은 별 고민도 없이 찍고 동의 없이 타인을 담아내며, 이미지를 무수히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도 불쑥 보낸다. 하지만 필름값을 절약하는 대신 ‘무뎌지는 감각’이라는 더 비싼 대가를 매일 지불하고 있다.


사진은 말(言)이다. 말은 많을수록 무례를 범하기 쉽고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타인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는지도 무감각해진다. 흔히 알듯이 사진을 찍는 행위는 지나가는 순간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사진의 소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과 관계의 부재를 더욱 강하게 나타낸다. 신이 인간에게 시간을 감지하는 선물과 함께 시간의 한계를 아는 고통도 주었듯이 과거의 내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진은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게 해준다.


1839년 사진술의 발명 직후부터 쓰인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한 ‘포토그래프’라는 말이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시각적 현상의 뜻을 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사진’이란 말은 1863년 조선인에 의해 사진이 처음 경험된 시기부터 택해졌다. ‘참된 것을 베낀다’는 뜻의 사진(寫眞)은 초상을 일컫는 용어로 이미 13세기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달마대사상찬’이란 글에서 달마대사의 초상을 일컬어 사용됐다. 초상의 경험으로 시작된 우리의 사진은 ‘시각적 현상’보다는 ‘진실’에 관한 것이라는 정서를 담고 있다.


“산업화된 사회는 시민들을 이미지 중독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수잔 손탁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기엔 우리는 사진의 신비함을 아직 많이 모르며 사진의 조심스럽고 수줍은 말을 감지할 수 있는 우리 안에 숨겨진 예민한 감각을 아직 믿기 때문이다. 사진은 말이다. 그리고 분명 영혼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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