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이런 상상을 해보자. 어느 지역의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 해 먹고 살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찾아온 경제 위기로 말미암아 온통 실업자가 된다. 걱정이 태산이다. 금방 다른 일자리가 생기는 것도 아닌지라 실업 상태는 꽤 오래갈 듯하다. 몇 달 정도야 그간 조금씩 저축한 돈으로 버틸 수 있지만 그 뒤엔 월세도 밀리기 시작하고 아이들 간식비도 벌지 못해 속이 탈 것이다. 마침내 주머니가 텅 빈 상태에서는 길거리에 나서기도 겁난다. 소가 움직이면 똥을 싸듯, 사람이 움직이면 가는 곳마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은행을 털거나 가게에서 물품을 함부로 훔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마이클 린턴이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원래 영국 출신의 프로그래머로 1983년에 캐나다 코목스 밸리라는 작은 섬마을에서 경제 불황으로 실업자가 급증하자 ‘현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물물교환에 기초한 지역화폐(대안화폐) 운동을 시작했다. 그 단위는 ‘녹색달러’였다. 이는 기존의 잉여생산물이나 상품 교환이라는 시장 거래 방식을 넘어 사람 그 자체가 가진 재능이나 노동력을 서로 교환해 삶의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해결해보자는 아이디어다. 지역화폐를 ‘레츠’(LETS)라고도 하는데 이는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의 줄임말이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적 품앗이와 비슷한데, 상부상조하는 문화를 보다 체계적으로 구축하려는 것이다. 그는 전문적인 프로그래머답게 컴퓨터 계정을 만들어 사람들의 거래 내역을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기록했다. 그 결과 최초 4년 동안 거래된 총량이 35만 달러에 이르러 정부나 일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즉 거액이 드는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이나 새로운 투자 재원의 투입 없이도 지역 내의 사람들 사이에 교류를 활성화해 그 자체가 일자리 창출의 효과를 가짐과 동시에 그동안 고립적으로 살던 개인들이 공동체적 관계망을 회복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90년대 이후 영국에서만 약 500여 건의 지역화폐가 개발됐고, 호주나 뉴질랜드에서도 300여 건이 창출됐다. 이어 유럽 대륙의 스위스ㆍ이탈리아ㆍ독일ㆍ프랑스ㆍ네덜란드 등지에서도 숱한 실험들이 이뤄졌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남미 여러 지역에서도 지역화폐가 진행 중이다. 호주의 경우 멜라니 지역이 대표적이며, 한국의 경우는 대전의 한밭레츠, 과천의 과천품앗이가 가장 대표적이다. 최근엔 서울시에서도 ‘S-머니’라는 대안화폐(포인트)를 도입해 자신의 노동이나 서비스를 서로 선물처럼 나누는 문화를 장려하려 한다.

  한편 최근 국제적 차원에서 미국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자 물물교환이나 자국 화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 모색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태국(쌀)과 이란(석유)은 자국의 대표적인 자원이나 생산물을 맞교환하기로 결정했다. 나아가 남미의 쿠바ㆍ베네수엘라ㆍ볼리비아 등은 자유무역협정이 아닌 민중무역협정을 체결하고, 각기 의료겮?칮콩 같은 고유의 자원을 맞교환한다. 이 사례들은 작은 지역만이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도 사람 중심의 공동체 문화를 만들려는 대안적 시도이다.

  <전쟁과 평화>에서 “아,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슬픈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라는 톨스토이의 한탄은 더 이상 지역화폐 시스템에서는 찾기 어렵다. 물론 아직도 미국 달러를 위시한 중앙은행권의 권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이 권력은 좀처럼 붕괴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지역화폐는 마을ㆍ지역ㆍ세계공동체의 활성화에 이바지할 것이다.

  첫째, 지역화폐는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친밀한 관계, 신뢰의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상부상조의 공동체 문화를 활성화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앙은행권(돈)을 벌기 위해 인간성을 상실하면서조차 피고용인으로 또는 사업가로 하루종일 일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 크다. 서로가 서로를 밀치며 먼저 나가려는 ‘팔꿈치 사회’에서 우리는 극심한 소외를 겪는다. 지역화폐는 이에 대한 대안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둘째, 지역화폐에서는 이자ㆍ이윤이 없으며 부채나 투기가 없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타자를 희생시켜 자신의 이득만을 취할 순 없다. 게다가 정말 가난한 자도 생필품 등을 마이너스 계정으로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고 산다. 그 대신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자부심을 느낀다. 돈의 경제가 아닌 삶의 경제, 죽임의 경제가 아닌 살림의 경제가 가능하다.

  셋째, 지역화폐는 회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가치(화폐 또는 부)가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갈 수 없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통용되기 때문에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 게다가 교류가 활성화되어 공동체적 관계망이 회복될수록 ‘부익부 빈익빈’ 같은 양극화도 줄어든다. 즉 달러 또는 중앙은행권 중심의 경제는 부의 집중과 독점을 부르는 데 반해 지역화폐 중심의 경제는 분권화와 평등화를 촉진한다.

  물론 지역화폐가 아무런 문제없이 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워낙 중앙은행권의 위력이 크고, 사람들이 기존 화폐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지역민 사이의 교류가 웬만큼 활성화하지 않는 한, 지역화폐를 통해 생계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긴 어렵다. 하지만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처럼 레츠 시스템을 기존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모순을 모두 극복할 혁명적인 것으로 보긴 어려울지라도 적어도 우리에게 그것은 ‘대안적 상상력’을 촉진하는 현실의 실험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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