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미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소토코모리는 프리터, 로스제네와 같이 최근 일본 젊은 세대의 삶의 조건과 양식을 담고 있는 단어 중 하나다. 이는 일본 밖, 특히 물가가 싼 아시아의 특정지역에서 은둔형 외톨이를 일컫는 히키코모리와 유사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이들은 일본에서 아르바이트 등 프리터 생활로 단기간 집중적으로 일하고 일정한 자금을 모아 물가가 싼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을 반복한다.

  한편 ‘미스김’은 최근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갈등의 한 축으로 한 드라마 <직장의 신>(전창근, 2013)의 주인공으로 3개월만 일하고 이후 외국으로 나가 삶을 즐기는 ‘자발적 비정규직’이다. 이는 일본 드라마인 <파견의 품격>(요시노 히로시, 2007)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원작의 시대적 배경은 소토코모리가 탄생한 배경과 다르지 않다. 소토코모리와 미스김은 일본의 장기 침체기, 노동시장의 양극화의 어두운 그늘 속 일본의 2-30대와 다르지만 같은 모습이다. 회사가 곧 자신이었던 부모님 세대와는 다른 삶-원하던, 혹은 원하지 않던-을 직면하는 이들은 이제 일이나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이처럼 비현실적 존재인 ‘미스김’을 현실감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계약 연장을 위해 임신을 숨겨야 하고 언제 계약이 해지될지 모르는 비정규직과 ‘회사의 노예’로 사는 정규직의 불안한 삶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IMF 경제위기 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동유연화는 불안정한 고용·노동으로 이어졌고, 정규직 고용 중심의 사회안전망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은 불안정한 삶을 재생산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겨우 법․제도를 통해 형식적 평등을 성취한 여성들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다. 드라마이긴 하지만 <직장의 신>을 보라, 계약직은 모두 여성이 아닌가.  

여성 고용율과 젠더평등의 딜레마
 
  박근혜 정부 고용노동정책의 핵심은 ‘고용률 70% 달성’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전 정부는 출범 당시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임을 내세우며 매년 일자리 60만 개, 5년 간 일자리 300만 개 창출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결과는 초라하다. 지난 5년 간 일자리 창출은 130만 개에 그쳤고, 그 일자리마저도 토목·건축 등 특정산업에 몰려 있었다. 또한 고용 형태 역시 임시직·계약직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 정부의 ‘고용율 70% 달성’ 목표도 우려스럽다. 현재 전체 고용율이 63-4%정도인 것을 고려할 때, 이는 쉽지 않은 목표치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현 정부가 관심 갖는 두 집단은 청년과 여성이다. 청년과 여성은 개념적으로는 배타적 범주가 아니지만 정책 현실에서는 배타적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여성’은 자녀를 둔 기혼 여성으로 일과 자녀양육, 즉 일-가정을 두고 갈등을 겪는 여성들이다. 따라서 여성고용노동정책은 일-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지원정책이 주를 이루게 된다. 1988년 처음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이 2007년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로 개정된 것은 상징적이다. 여기서 ‘일·가정양립 지원정책’은 그 자체로 젠더평등 정책이라기보다는 젠더평등이 어떤 조건하에서 시행되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정책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일·가정 양립 지원’이 단순히 여성 고용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될 때, 노동시장에서 젠더평등의 모습은 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 여성고용율을 높이는 것이 곧 노동시장에서 젠더평등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의 고용율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여성친화적’ 일자리는 대부분 저임금·불안정 고용을 반복해야 하는 일자리로 성별임금격차를 심화시킨다. 또한 그 일자리 마저도 특정 직종에 제한됨으로써 성별 직종분리를 강화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가정 양립을 가능케 하는 여성을 위한 일자리는 영원히 비정규직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덫인가, 정규직으로 가는 징검다리인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오래된 딜레마는 오늘날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의미하는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로 다시 등장했다.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는 고용평등정책인가
 
  최근 시간제 일자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이미 충분히 노동의 유연화가 진행됐고(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비정규직화 형태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제 일자리 도입이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나쁜’ 비정규직 일자리를 확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로 새삼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반듯한’ 일자리는 ‘정규직 시간제 일자리’를 의미한다. 즉 고용 안정성이 보장되고 사회보험, 상여금, 퇴직금과 같은 제도에서 비교대상이 되는 정규직과의 차별없는 일자리다. 이는 명목상 성중립적 일자리지만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여성 혹은 여성들이 주로 고용되어 있는 직종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에 ‘당연히’ 여성을 위한 일자리로 이해되고 여성 고용정책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실상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 지원 정책의 주요 내용은 정규직의 고용형태와 복지 혜택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 노동시간에 대해서 계약직 노동자를 채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고용안정성을 유지하는 일자리 나누기 정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젠더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이는 여성들 간의 제로섬게임에 지나지 않아 성별직종분리를 상징하는 또 다른 유리벽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일·가정 양립 정책이 단순히 여성이 선호한다는 이유에 한해 여성정책이 될 때, 정책의 불평등한 젠더효과는 자명하다. 그동안 노동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들이 오히려 그 대상을 규제한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여성을 위한 고용정책들도 결과적으로 평등보다는 새로운 차별과 분리를 양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정규직보호법안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 그 예다. 이처럼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 지원정책이 여성고용정책으로 한정된다면 이와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젠더 평등의 미래, 고용을 넘어 사고하기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를 둘러싸고 시간제 노동과 노동시장에서 젠더평등의 오랜 논쟁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실질적으로 여성이 시간제 일자리를 선호한다는 주장이 신화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그 이전에 여성들이 왜 시간제 일자리를 선호하는지, 여성들의 선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주장들은 시간제 일자리 논쟁에서 반복·재생산 되어 같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규직 시간제 일자리의 문제의식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일 중심에서 삶 중심의 사고를 가능하게 해 논의에서 한 발 나아간 듯하다. 하지만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가 여성 정규직 일자리를 여성 비정규직과 나누는 결과를 간과한다면 다시 시간제 일자리와 젠더평등의 진부한 논쟁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불안정 노동, 여기서는 시간제 일자리의 속성이 취향의 문제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강제적 속성이 되며, 정규직/비정규직이 계급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미스김’과 같은 자발적 비정규직의 존재는 판타지가 된다. 따라서 ‘일자리가 곧 복지’이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이 목표가 되는 사회가 아닌 복지의 하위 범주가 일자리가 되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가령 ‘미스김’의 일과 삶에 대한 태도가 남성과 여성 노동자 모두의 미래가 되면 왜 안되는가. ‘미스김’이 미래다. 전 세계 ‘미스김’이여 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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