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순 /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오늘날 정치는 부정적이다. 지배구조에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정치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창의적인 시도들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한 부정적인 정치는 이 시대의 징후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정치는 항상 현재적이다. 정치에 대한 모든 사유는 현재를 통해서만 규정된다. 일찍이 플라톤은 이데아의 인식에 도달한 철학자가 최고의 정치를 펼치는 철인군주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은 인민주권론을 제창하면서 현대 민주주의 정치 상을 제시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정치란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정치를 인간 궁극의 정치 모델로 제시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양면성을 지닌다. 그들의 정치적 사유가 겨누고 있던 것은 어느 정도 정치를 선의 영역/진리의 영역으로 고정시키고자 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유가 현재적 맥락에서 완전히 유리된 것은 아니다. 모든 정치적 사유는 ‘현재적’이며 자신의 시대를 비춘다. 그 사유들은 동시대적인 맥락에서 제기되는 정치의 문제에 개입해 정치의 틀을 고정하고, 그 본질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정치는 현재적인 가운데서만 본질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현대의 모든 사유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반플라톤주의라는 점은 폭넓게 인정되는 관념이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현대 사상의 화두인 반플라톤주의의 정점을 보여준다. 아렌트는 현대 주권국가의 극단적인 형태인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대의 국가가 정치를 삶과 유리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전체주의가 행했던 이른바 ‘수용소 정치’는 인간의 자율성을 말살시켜 인간을 단순히 ‘살아있는 몸’으로 만들었다. 이에 인간은 자발성을 상실하고 의식 전체를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비극은 정치에 대한 철학의 지배, 즉 플라톤주의에서 결과한 것이다. 플라톤은 정치가 진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를 철학에 종속시킨 장본인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은 정치의 토대를 정치적 영역 밖에 두는 동시에 철학에 종속시키려 했다. 그는 철학적 사유를 정치적 삶의 방식과 현상 영역에 직접 적용함으로써 정치적 질서를 ‘진리 추구’에 입각해 재구성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철인정치는 무분별한 군중의 지배인 고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철학의 개입이며, 이를 통해 정치는 철학에 지배당하게 된다.

  아렌트는 이런 비판을 통해 ‘의견의 정치’로 나아간다. 그는 인간을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때 소통되는 것은 의미 없고 잡다한 말이 아닌 ‘의견’, 다시 말해 각자의 삶이 갖는 고유성으로서의 ‘의견’이다. 인간은 최상의 활동인 정치 행위를 통해 의견을 소통하고 본질적인 삶의 차이들을 교환한다. 이때 우리는 진정한 소통을 볼 수 있고 인간은 각자의 고유성을 찾게 된다. 인간이게끔 하는 것은 타자와의 소통과 인정이다. 정치적 소통 행위는 최상의 인간 활동이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사안에 대한 의견 표명과 토론으로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공적 영역이라는 정치적 장이 건설될 수 있다. 이러한 아렌트의 입장은 지극히 반플라톤주의적이다. 그는 플라톤이 정치에서 제거하려 했던 ‘의견’을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내세운다. 이를 통해 동일자적 진리와 결별하고 정치적 다양성의 지배를 확립하려 한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성찰이란 다양성에 대한 성찰일 뿐이다. 철학적 진리와 단절하고 정치의 고유성을 통해 정치를 사유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일견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의견과의 단절과 ‘열린’ 진리


  이러한 아렌트의 사유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바디우의 철학이다. 바디우는 현대 의회민주주의를 의견의 체제로 정의하고, 여기서 어떠한 진리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정치란 지배-피지배 관계의 역전 가능성과 새로운 집단적 삶의 조직 가능성이 모색되는 절차다. 정치적 진리란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념들을 통해 드러난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사건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이 드러난 것으로 그 이념을 확신하는 주체들의 실천을 통해 정치적 세계를 변화시킨 중차대한 계기였다. 확실히 바디우의 철학은 이른바 전체주의적 사유에 포섭되지 않는다. 선재하는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건에 충실한 실천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진리란 무한한 것으로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무한한 진리는 유한한 법으로 실현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다시 활성화될 수 있다. 오늘날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이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법칙적 규정이 부과하는 제한 속에서만 인정된다. 자유와 평등은 여전히 추구해야 할 것, 그것에 충실한 실천을 통해 더 근본화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있다.

  바디우에게 오늘날의 의회민주주의는 어떤 보편성도 전제하지 않는 제도의 지평에 갇힌 정치일 뿐이다. 물론 바디우에게도 정치적 행위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정치행위는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이념, 정치적 진리에 충실할 때 비로소 긍정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 넓게 보아 정치적 행동이란 그 이념의 충실성으로 진리를 옳은 것으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다. 정치는 역동적인 정치적 실천과 그것이 추구하는 이념이 결합할 때만 현재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의견의 법칙을 중단시킴으로써 지배-피지배 관계의 역전을 가능하게 한다. 바디우에게는 의견과의 단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현재적 정치의 과제이다. 그것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진리의 관철로 나아가는 정치적 이념일 것이다. 주체의 실천이란 바로 그러한 단절을 수행하고 정치적 이념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의견의 체제는 오늘날 어떠한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모든 정치 행위가 선거에서의 투표로 환원되는 오늘날 정치 구조는 사실상 다양한 의견을 지배적 구조의 재생산으로 연결시키는 보수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바디우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의견과 그것들의 합의를 중심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의회민주주의의 정치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 보편적인 정치의 장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념은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바디우의 열린 플라톤주의가 갖는 함의다. 바디우는 정치를 진리의 생산 절차로 간주하면서 정치적 행위를 추동하는 이념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문제는 의견이 아니다. 의견은 진리에 의해 가로질러지는 차이들일 뿐이다. 진리는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이 보여주는 차이에 개의치 않고 모든 사람들의 삶에 개입한다. 보편적 이념과 연동된 진리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바디우는 플라톤주의자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전형적인 플라톤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열린’ 플라톤주의로서 그의 진리는 확정적으로 명명할 수 없는 유(類)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정치를 다른 사유에 종속시키지 않고 정치 그 자체를 사유한다. 그리고 철학은 이 과정에서 드러난 이념과 진리를 사유한다.

  나아가 바디우에게 그 실천의 현재성은 이념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물론 우리는 아렌트가 말한 진리의 전제를 경계해야 한다. 정치적 진리가 고정적으로 명명되고 실체화될 때 그것은 악이 되며, 이는 곧 무서운 폭력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진리는 열린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바디우에게 완전히 고정될 수 없고 항상 새로운 실천적 시도들을 통해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진리는 더욱 풍부해지고 항상 현재적인 것으로 남을 수 있게 된다. 아렌트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정치의 또 다른 모습, 정치적 진리의 또 다른 윤곽이란 바로 이것이다. 영원을 향해 열려 있는 진리, 이야말로 진리와 정치를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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