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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1.11 수 11:46
기획문화
[문화] 재능기부, 자본주의의 새로운 장치전은기 / 문화연구학과 석사수료
윤정기 기자  |  wood01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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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호]
승인 2013.03.07  03: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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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재능기부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언제나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간주되는 이 신조어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개인(몇몇 다른 사전들에는 기업)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인의 이익이나 기술개발에만 사용하지 않고 이를 활용해 사회에 기여하는 새로운 기부형태”를 일컫는다. 즉 개인이 가진 재능을 사회단체 또는 공공기관 등에 기부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다. 재능기부라는 신조어에 대한 논의에 앞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재능이라는 것이 기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와 재능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창조성과 재능


  이견이 많을지도 모르나 전통적으로 창조성이라는 개념은 예술과 관련된다. 예술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통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는 현실영역을 꿰뚫고 들어가는 것으로 규정되곤 했다. 이렇듯 기존의 창조성이란 개념이 ‘특별한 자질로서의 창조성’에 가까웠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창조성은 ‘획득하는 창조성’의 개념에 더 가깝다. 우리는 ‘누구나 창조적’이며 창의교육/창조교육 등을 통해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창조적 능력을 배양시킬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이러한 창조성은 늘 획득 가능한 재능의 한 종류이며, 언제나 긍정적이고 좋은 변화를 가져다 줄 그 무엇(예컨대 혁신)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재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어사전에는 재능이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해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고 기재되어 있다. 특히 현재 통용되는 재능이란 단어는 훈련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빈번히 사용된다. 사람들 모두에게는 각각 재능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끊임없이 계발해야만 한다고 이야기된다. 우리가 재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는 끊임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이 무엇인지 발굴해내야 하며, 설사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노력을 통해 배양해내야 한다. 이때 효율성으로서의 창조성 혹은 창의성이 바로 계발해 낼 수 있으면서도 모두가 지니고 있는 재능으로 부각된다.

  언제부턴가 재능이라는 것은 이력서의 한 칸에 병기되기 시작한 ‘특기’, 각종 자격증과 어학능력, 독창적이고 가치있는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창의(창조)성’을 가졌다는 계산가능한 증거가 됐다. 재능이 계산되어질 때, 재능을 계발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정언명령이 되어버린다. 우리 모두에겐 창조적인 잠재적 능력, 즉 재능이 부여되지만 이를 계발하기만을 요구받는다. 규율권력에 의해 규율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기술에 의해 규율되는 것이다.
 

재능기부는 과연 기부(증여)인가?


  기부(증여)는 경제적 거래의 상호성의 논리를 따르는 교환의 장과는 다른 경제, 즉 선물경제이며 자본주의적 시장의 수사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기부행위는 일반적으로(등가교환을 전제로 한) 상품교환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가 적용된다. 선물이라는 것은 인격성이 결여된 등가교환이 아니라 물을 매개로 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격적인 ‘무엇’이 이동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증여라는 행위에는 ‘증여되는 물질’, ‘증여하는 사람’ 그리고 ‘증여받는 사람’이 필요하다. 증여의 대상이 되는 ‘물질’은 증여하는 사람에게도 증여받는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실체성이 인정될 때만 인격적인 가치의 순환이 발생하게 된다. 재능이 계산가능한 무엇인가가 되면서 재능기부는 증여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품교환의 원리로 작동된다. 게다가 기업, 공공기관 등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재능기부는 증여하는 자와 증여받는 자의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를 흐릿하게 만듦으로써 이러한 변화를 강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기부는 반경제적 경제의 실천이라는 환상에 기초해 관대함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갖는 증여행위로 간주된다. 기부과정에서 드러나는 이해관계와 계산을 부인함으로써 기부자들의 자기기만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들이 스펙으로서의 봉사시간과 경력을 획득하는 것과 기업들의 탐욕적인 이윤추구 활동이라는 본질적인 모습은 가려지고 사회에 공헌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다는 개인과 기업들의 자기만족과 도덕적 신뢰만이 주어지게 된다.

  하지만 재능기부의 핵심은 이런 것들에 있지 않다. 재능기부 담론에서 ‘증여하는 자’와 ‘증여받는 자’는 푸코가 근대성의 핵심 담론정치로 주장했던 생물학적 위계로서의 ‘정상’과 ‘비정상’으로 볼 수 있다. 재능기부에 대한 담론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시화된 차이와 차별, 배제와 같은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주체가 스스로를 기부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을 계발한 또는 계발하는 무의식의 주체가 되도록 강요받는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재능을 계발하고 그 재능을 기부하도록 강요하는 것일까? 공동체를 유지하는 사회적 비용을 부자들이 떠맡아야만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같은 정치철학적 논의들에서 사유재산이라는 자유주의 불가침의 영역을 보호하고, 대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추가적인 노동력을 지불하도록 강제하기 위함이 아닐까?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순을 제어하기 위해 이러한 윤리적/도덕적 담론을 만들고, 제도화하려는 것은 아닌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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