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 / 송상훈

 

  90년대엔 운동의 기층 역할을 수행했던 공동체들의 운동성이 탈각되는 것이 화두였다면, 현재는 자치단위의 존폐 자체가 화두이다. 운동적인 성격과 관계없이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이 자치단위의 가장 큰 고민이 됐다. 하지만 금융투자동호회, 취업과 미래를 대비하는 공동체는 많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운동이 여전히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대두된다.

 

▲<Deforestation> , Sandra Scheetz-wise, 2011
▲<Deforestation> , Sandra Scheetz-wise, 2011

 

 

학생운동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준성: 일반적으로 빈민운동, 노동자운동을 이야기할 때 운동 앞에의 ‘주체’들이 붙는다.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이라 하면 일단은 학생들이 하는 운동일 것이다. 노동자운동이 노동자 계급의 운동을 하고 빈민운동이 빈민의제로 운동을 하지만, 학생운동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학생의제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에 그 특수성과 고유성이 있다. 특수한 계급적 이익에 복무하지 않는, 선도적으로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운동을 만들었던 것이 학생운동이었다.
상훈: 학생운동의 역할은 시대의 어두운 면들을 밝혀나가는 것이었다.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이루는 데서 앞장섰다. 그것이 가장 극대화됐던 때가 8-90년대였던 거 같은데, 90년대 후반부터의 하락세로 최근 더욱 약화되는 현실이다.

학생운동의 위기의 양태와 원인은 무엇인가?
준성: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 학생들 사이의 정치가 가능한 공간이 많이 붕괴되어 왔다. 과반학생회, 학회 등이 무너지고 있는데 정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다시 재건하는 것이 학생운동의 시급한 과제다. 나는 학과 학생회에서 활동을 많이 해왔는데,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논쟁, 토론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어려워졌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면 그것이 과 내부에서 환류됐지만 최근엔 학과를 개인적인 공간으로 벽을 치며, 학생회가 나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정치의 공간이 사적인 공간으로 바뀌면서 학과 등의 공동체에서도 정치는 사라지고 단지 즐거운 것이 중요한 것이 됐다.
상훈: 지금의 상황이 자연발생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과거엔 대학사회에서 기득권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굉장히 몰상식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전경련캠프라든지, 학내 포탈 등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학내에 많이 유포됐다. 이러한 외적인 조건과 함께 활동가들 자체도 알게 모르게 확신을 잃고 위축됐던 것 같다.

과거엔 학생을 묶을 수 있는 공통된 범주들이 상대적으로 명확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파편화되어 있고 동일하게 ‘학생’이라고 호명하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조건이 변화하고 있다.
준성: 과거에 비해 대학의 위상이 달라졌다. 80년대는 대학생 자체가 적었고, 학교는 엘리트 대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민중의 아들, 딸’이자 엘리트적인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규정했지만, 지금은 대학생이 400만 명이고 사실상 동일하게 호명할 수 없게 됐다. 여기서의 운동은 학생을 단일한 주체로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갖는 대학생들과의 논쟁·대화가 중요하다.
상훈: 어느 계급·계층이든 간에 의식지형이 다변화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학사회의 전통적인 역할은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안-비판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매년 대학의 전체 구성원의 1/4이 바뀐다. 현재 학우들이 어떤 경향성을 보이더라도 변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그럼에도 대학사회에서 학생계층의 시대적 역할과 한국사회 변화에 미칠 수 있는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

학생사회의 보수화로 비/반권이 득세하며 서울 주요대학 총·단과대 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은 대다수 패배했다. 비/반권은 탈정치화된 의제를 통해 정치를 환멸하는 학우들의 원한과 만나며 선거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결국 해가 지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느끼는 학생들에게, 학생회 선거는 4, 5년 마다 한국 의회정치에서 볼 수 있는 여-야 지배계급 간의 권력투쟁에 머무는 한국정치의 축소판이 아닌가? 학생들은 학생회를 통해 무엇이 달라지길 기대하며 투표한다고 보는가?
준성: 비권은 학우들이 원하면 투쟁하고 원하지 않으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수 있다는 유연한 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운동권의 차별성은 ‘우리는 학우들이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한 주장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밝혀야 한다. 학생들은 운동권이든 비권이든 바뀌는 것이 없다는 자조적인 생각을 함에도, 학생회 선거는 매년 성사된다. 그들이 투표를 하는 이유는 정치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상훈: 최근 몇 년간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누가 학생회를 집권하던 간에 학내 운동진영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비권이 큰 비교우위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08년 이후에 신자유주의 위기와 종말이 확증되어감에도 대학사회의 구도는 반전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운동하는 주체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자치단위 기반의 운동 말고도 당의 청년학생위원회 등의 운동이 있다. 이는 주류정치에 합류하는 학생운동이다. 당은 청년의제를 청년학생위원회 등에 위임하고, 당의 젊은 이미지를 통해 청년표를 모으기 위해 청년정치인들을 내세운다. 이러한 정치활동은 학생운동과 질적으로 다르다.
준성: 이들의 장점이라 한다면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 등록금, 청년의제들을 모아서 이슈화시키는 데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대중과 정치가 분리되는 방식이다. 정치는 청년학생위원회가 하고 대중조직은 낮은 수준의 의제들만 가지며 정치활동과 분리된다. 분리가 아니라 대중조직에서도 정치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
상훈: 총선에서도 청년국회의원이 있었고, 이들을 통해 구체적인 현장에서 학생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실제로 반영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좀 더 대중적인 지반을 탄탄히 해야 그 힘을 바탕으로 정치적 의제화를 위한 동력도 얻을 수 있다.

04년 전국대학생협의회가 해소하면서 ‘학생회 없는 학생운동’에 대한 입장들이 제출됐다. 지금 공통으로 나오는 말들이 공동체의 복원, 대중조직의 복원이다. 학생회를 넘어서는 학생운동은 불가능한가?
준성: 전학협에서 학생회를 해소하고 대학 평의원회 형식을 사고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상 위기 원인을 조직형태에서 찾거나, 학생회를 이데올로기 장치로 판단하고 해소하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진단이다. 대중단위에서 학생들 스스로 정치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생산해 낼 것인지가 중요하다.

올해부터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 위기의 가속화와 탄압이 저항과 혁명을 필연적으로 부를 수 없듯이 오히려 더욱 엄혹한 2013년이 될 것 같다.
상훈: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박근혜 정권은 아마 학생운동 자체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클 것 같다. 신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 스스로 존립의 위기를 느끼고 있기에 더욱 가혹하게 대응할 것이다. 경제민주화, 복지공약들을 내놓으며 좌클릭했던 상황들도, 본인들이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은 단단히 준비하고 그 틈을 뚫고 갈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준성: 문재인이 최다 득표 야당후보이고 이로써 반발이나 저항이 거세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많은데, 반대로 박근혜는 최다 득표 대통령이다. 그만큼 보수화되어 있고, 또한 대안세력이 부재한 상황이다. 대중적 저항이 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련된 방식으로 불만들이 관리될 것이고, 학생운동은 여전히 어려울 것 같다. 아래에서부터 다시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준성: 운동권하면 기계적으로 위에서 지침이 내려오고 그에 따라 모든 것이 진행될 것이라는 오해가 있다. 학생운동이 가장 필요한 것은 대중단위, 아래의 공간에서부터 정치를 하고, 그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무너진 정치는 아래서부터만 복원할 수 있다. 잃어 왔던 대원칙을 다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상훈: 학생운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민중성이다. 민중들의 고통을 함께 하고 반드시 해결해 내겠다는 것이 체화되어야 어떤 악랄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변화에 대한 확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다종 다기한 학우들의 요구를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 박근혜에 대한 분노가 학생운동에 대한 믿음으로 모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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